▲ 정이신 논설위원·목사
▲ 정이신 논설위원·목사

'어쩌다 보니' 한 해가 저물어 갑니다. 내년에는 어떤 일이 기다릴지 염려가 되기도 하고, 기대가 되기도 합니다. 총선이 있어서 여러 가지 쟁점이 와각상쟁(蝸角上爭)을 벌일 텐데, 거기서 발생한 소음을 또 들어야만 하는 게 달가운 일은 아닙니다.

군에 사병으로 의무 입대한 후 탈영하지 않기 위해 책을 읽었습니다. 사병으로 있는 동안은 제가 살아온 흔적이 논리적으로 설명되거나 합리적으로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군 생활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해 선임 사병들에게 늘 괴롭힘의 대상이 됐었습니다. 왜 그렇게 군대 생활이 꼬였었는지 지금도 풀지 못하는 수수께끼입니다.

'어쩌다 보니' 칼럼 때문에 고등학교 동기에게 오해를 받았습니다. 제가 쓴 글을 다 읽어보지도 않고, 칼럼의 제목만 보고 편견으로 시비를 걸더군요. 그래서 고등학교 동기가 모여 있는 밴드에 제가 올린 글을 다 지웠습니다. 제가 기독교인이니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이 있으면 그도 글을 올려달라고, 처음부터 간곡하게 부탁하고 시작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글을 쓰지도 않고, 제가 쓴 칼럼도 다 읽지도 않은 채, 편견에 젖어 엉뚱한 시비를 걸었습니다. 그래서 그곳에서는 휴지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어쩌다 보니' 북향민과 대한민국의 청소년·청년에게 독서·논술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문해력에 관해 연구했던 결과를 이들에게 알려주기 위해 시작한 일인데, 올해도 학생들이 대안학교로 찾아와서 이들과 같이 책을 읽었습니다. 또 가르쳤던 북향민 제자 중 한 명이 올해에 결혼식을 했기에 거기에도 다녀왔습니다.

저보다 더 아팠던 북향민 제자들의 이야기를 듣고, 이들의 눈동자를 보니 그럭저럭 버티면서 제 길을 갈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들과 같이 버틴 이야기를 세이프타임즈에 칼럼으로 썼습니다. 그렇지만 엄마가 돌아가신 후의 폭풍은 견디기 힘들었습니다. 유산을 정리하고 난 후 가족이 없어졌다는 좌절감이 매우 아프게 다가왔습니다. 형이라고 부를 수 있는 그가 없어졌고, 엄마 제사를 제가 따로 챙겨야 했습니다. 그때 예전에 끓어오르는 화를 다스리기 위해 썼던 글을 다시 읽어 봤습니다. 그런데 그 안에 제 마음을 치료할 수 있는 처방이 있었습니다. '어쩌다 보니' 썼던 글인데, 그게 이때를 위한 대비책이었습니다.

군에 의무복무하면서 그 시공간을 버티기 위해 책을 읽게 됐고, 그 덕에 NGO에서 청소년에게 독서법을 알려주게 됐으며, 북향민을 가르치면서 제게 주어진 고통을 이겨낼 힘을 얻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하나님 앞에 갈 때까지 하는 게 공부라고 합니다. 특정 시기까지만 하는 공부는 시험을 위한 노동입니다. 나를 위한 공부는 하나님 앞에 갈 때까지 꾸준하게 해야 합니다.

한 해를 돌아보니 우연히 이렇게 된 일이 많은 것 같은데, 만약 이게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의한 계획이었다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지금까지 겪었던 일이 올해의 저를 만들기 위한 공부였다면, 우연과 필연을 어떻게 나눠야 하는지 궁금해집니다. 필연이라면 앞으로 주어진 날도 일정한 방향으로 흘러갈 것이고, 그걸 통해 제게 주어진 시공간에 공짜가 없다는 걸 확인하게 될 것입니다. 뭔가 묵직한 것으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 같습니다.

문득 "중용(中庸)"에 있는 문장에 마음의 닻이 내려집니다. 人一能之己百之(다른 사람이 한 번 해서 능해지면 백 번 해서라도 능해지고), 人十能之己千之(다른 사람이 열 번 해서 능해지면 천 번을 해서라도 능해져라). 사람이 나이를 한 살 더 먹는다는 건 마음을 넓히기 위해 앞으로 더 노력해야 한다는 뜻이니, 내년에도 그렇게 제 마음을 넓히며 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저는 '어쩌다 보니(우연)'와 '계획(필연)' 사이를 오가며 이렇게 한 해를 보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제 삶에서 이 둘을 두부 자르듯 명확하게 구분하지 못합니다. 내년에는 이 둘을 제대로 구분했으면 좋겠습니다. 애독자 여러분,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정이신 논설위원·목사 △한양대 전기공학과 졸업 △백석대 신학대학원 졸업 △아나돗학교 대표간사 △아나돗공동체 위임목사 △세이프타임즈에 '노희(路戱)와 더불어 책(冊)놀이' 연재, 칼럼집 <아나돗편지(같이 비를 맞고 걸어야 평화가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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