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이신 논설위원·목사
▲ 정이신 논설위원·목사

'아나돗 편지'에서 '정이신 칼럼'으로 제목을 바꾸기까지, 세이프타임즈에 글을 쓴 지도 벌써 몇 년이 지났습니다. 세이프타임즈에 기고했던 칼럼인 '아나돗 편지'는 인연의 끈이 닿아서 책으로도 발간했습니다. 제가 칼럼집을 내리라고는 생각해 본 적도 없이 살았기에, 그런 기회를 만들어 준 세이프타임즈가 고마워서 계속 글을 쓰고 있습니다.

'아나돗 편지를 쓰면서 여러 가지 사연을 담은 일을 만났지만, 그들·저들과 약속했던 대로 그걸 공적인 메시지로 바꾸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아나돗 편지'를 '정이신 칼럼'으로 바꾼 지도 꽤 됐기에, 제가 좌우명으로 삼고 있는 일을 이제는 말해도 될 것 같습니다.

안타까운 일이었지만, 그 일을 통해 허리에 철조망을 두른 채 남북으로 갈라진 한반도가 하나가 되는 일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 더 깊이 알게 됐습니다. 눈에 보이는 큰 돌들은 많이 제거했지만, 한반도가 하나가 되는 길 위에는 여전히 흉측한 돌멩이가 서로의 위세를 자랑하며 널브러져 있습니다. 이 방해물이 겉으로는 동포라고 하면서 평화를 말하고, 길 위로는 조그마한 돌머리를 드러낸 채 별거 아닌 것으로 위장합니다. 그러나 땅속으로는 엄청 깊게 얽히고설킨 온갖 장애물이 숨겨져 있습니다. 그래서 길 위에 널브러진 돌을 제거할 때도 늘 돌의 뿌리를 생각하면서, 보이는 것만 없애면 된다고 생각하지 않아야 합니다.

대안학교에서 가르쳐서 대학까지 보냈던 북향민이 갑자기 휴학하고 유흥업소의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여기저기 수소문을 해서 간신히 그를 찾아냈고, 이유를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엉뚱한 답이 돌아왔습니다. 대한민국으로 홀로 온 제자였는데, 늦기 전에 해외여행을 가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여행에 필요한 돈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그걸 말렸다가, 그에게 꼰대로 몰린 적이 있었습니다.

누군가가 그의 페이스북을 도용하면서 유흥업소에서 일하는 그에 관한 소식이 알려졌고, 이로 인해 그가 그곳에서 찍은 사진까지 유출됐습니다. 당시 저는 그에게 '네가 생각한 삶의 성취를 얻기 위해 너무 서두르는 게 아니냐'라고 물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를 둘러싼 세상의 모든 시각이 오해일 뿐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과감하게 자신을 성노동자라고 했습니다.

안해까지 데리고 가서 그를 만났지만, 제 말은 허공을 맴돌며 돌아오지 않는 메아리로 끝났습니다. 그 뒤 여러 날을 곰곰이 생각해 보니, 제가 그의 생애에 감정적으로 너무 깊게 몰입했던 게 패착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가야 할, 있어야 하는 곳까지만 '이들 북향민'과 같이 가면 되는데, 오지랖이 넓었던 저는 그들·저들까지 생각하면서 그들·저들에게 생각의 잣대를 바꾸라고 요구하고 있었습니다.

북한에서 대한민국으로 왔다고 해도, 그들이 겪어야 할 길을 올곧게 가지 않으면 그 사람은 제대로 바뀌지 않습니다. 그러나 저는 제가 쏟아부은 미천한 노력 따위로 그들·저들이 바뀔 것으로 생각했었습니다. 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그때는 제가 교만에  엄청나게 취해 있었기에 이런 게 보이지 않았었습니다.

그 사건을 통해 꼰대가 돼 가는 저를 경계하게 됐습니다. 그들·저들이 대한민국에 와서 어떻게 살든, 그들·저들이 우리나라에서 정한 법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않으면 됩니다. 그것으로 제가 할 일은 끝난 것입니다. 한때 제가 그들·저들을 가르쳤다는 것, 그들·저들이 앞으로 이곳에서 펼쳐갈 생의 그림이 안타까워 보인다는 걸 핑계 삼아서, 굳이 그들·저들이 가는 길까지 따라 다니며, '감 놔라, 배 놔라'라고 말했던 건 꼰대짓이었습니다.

그 일을 겪으면서 얻은 깨달음이 박기후인(薄己厚人)입니다. 자기의 가치관은 자기에게만 엄격하게 적용하고, 제자일지라도 내 가치관은 전시품으로만 보여줘야 합니다. 그때 일을 기억하면서 제가 꼰대가 돼 가고 있는 건 아닌지, 고담준론(高談峻論)의 사고에 갇혀 있는 건 아닌지 요즘도 늘 살핍니다.

■정이신 논설위원·목사 △한양대 전기공학과 졸업 △백석대 신학대학원 졸업 △아나돗학교 대표간사 △아나돗공동체 위임목사 △세이프타임즈에 '노희(路戱)와 더불어 책(冊)놀이' 연재, 칼럼집 <아나돗편지(같이 비를 맞고 걸어야 평화가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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