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이신 논설위원·목사
▲ 정이신 논설위원·목사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지만, 걷는 길은 평화로움과는 여전히 거리가 멀고, 교범에도 나오지 않는 이야기가 자주 등장하는 야전의 현장입니다. 대안학교에서 가르치는 독서·논술도, 교회에서 하는 사역도 여전히 불꽃이 튀기 직전입니다.

야전의 현장을 좋아하거나, 이쪽에 특별한 뜻을 뒀기에 이렇게 지내는 건 아닙니다. 진흙탕과 비포장도로가 만연한 들판보다 포도(鋪道) 위를 승용차로 달리는 젠틀맨이 되기를 꽤 바랐습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성령님이 저를 인도하신 길에는 포장도로가 별로 없었습니다.

정성껏 농사를 지으면서 세상을 해석하는 시인과 들판에서 수시로 떨어지는 온갖 위협을 벗 삼아 삶을 바라보는 이의 시각은 다릅니다. 그런데 목양(牧羊)이란 말의 뜻처럼, 지구촌의 따스한 풍광을 느끼며 사는 법을 사람들과 같이 공유해야 하는 일이 제 직업입니다. 그래서 마음은 야전의 현장과 거리가 먼 고향을 늘 그리워합니다.

야전의 현장은 에고(ego)를 수시로 죽여야 하는 곳입니다. 육신의 소멸처럼 한 번으로 끝나지 않는, 몸 곳곳에 숨어 있는 에고를 찾아내 수시로 죽여야 하는 곳이 이곳입니다. 고상한 욕망과 잡다한 전통으로 포장한 관습의 옷을 과감하게 벗어 던지지 않으면, 이곳에서는 제대로 숨을 쉬기 힘듭니다. 때로는 온갖 의료 장비가 갖춰진 종합병원이 아니라, 들판에 천막을 둘러친 야전병원에서 치료받아야 할 때도 있기에 더욱 그러합니다.

대안학교에서 가르치는 일은 이런 생활의 단면을 보여줍니다. 대안학교에서 배웠는데도 자기 삶의 성적을 올리지 못하면, 부상병이 가득한 참호와 같은 처지로 전락합니다. 수료생이 삶의 성적을 올리지 못한 대안학교에는 늘 위기가 찾아오고, 학교의 일부 과목이 수시로 폐강되는 일이 벌어집니다.

게다가 인간성이 존중되지 않는 야전의 현장은 동료애가 가득한 참호가 아니라, 약육강식의 정글로 변하기 일쑤입니다. 따라서 자신이 지닌 인간성을 존중받기 위해 이곳에서도 공부는 필수입니다. 대안학교에서 공부하는 이유도 이런 곳에서 인간답게 살아내기 위함입니다.

비포장도로와 먼지를 벗 삼아 살아가기에 야전 교회는 깔끔하지 않고, 곤충을 잡아먹기 위해 거미가 숭숭하게 줄을 쳐대는 일도 많습니다. 삐거덕거리는 발판을 일부러 쾅쾅 구르며 찾아오는 불청객도 있어서, 때론 예배마저도 시끄럽습니다. 그래서 야전 교회는 반드시 생명의 가치를 최우선으로 추구해야 합니다. 생명을 살리기 위해 들판에 천막을 치고 정주한 것이니 꼭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곳에 있으면 때로 '예수님의 제자로 살아도 되는데 굳이 이런 직함을 받았구나'라는 아쉬움이 들거나, 직분이 거추장스럽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교회의 직분은 제가 이곳에서 하는 일에 시빗거리가 생기지 않도록 해주는 것이기에 좋은 것입니다. 그렇지만 총알이 계급장을 보고 피해 가는 게 아니기에, 이곳에서의 생활과 직분이 어울리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중국 성당기(盛唐期)의 시인 잠삼(岑參)이 쓴 "행군구일사장안고원(군영에서 9월 9일에 고향 장안을 생각하다)"를 읽으면서 야전의 현장과 고향이란 이질적인 조합을 다시 생각해 봅니다. 전쟁과 평화가 동전의 앞뒤기에, 이 둘은 하나이면서도 서로를 보지 못합니다. 서로의 등 뒤에 나와 다른 존재가 있다는 정도만 아는데, 이로 인해 군인과 시인은 노래하는 대상이 다릅니다.

시의 배경인 음력 9월 9일은 중양절(重陽節)이란 중국의 명절이었습니다. 잠삼도 명절 풍습에 맞춰 높은 곳으로 올라갔는데, 명절 분위기에 걸맞지 않게 그에게 술을 보내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고향을 생각하는 마음은 있었지만, 그가 지냈던 곳이 군영이었기에 명절은 마음으로만 즐겨야 했습니다.

잠삼이 겪었던 일처럼 야전의 현장과 고향이 우리 앞에서 서성이는 새해입니다. 애독자 여러분이 어느 곳에 있든지 세이프타임즈로 인해 우리는 하나라는 걸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정이신 논설위원·목사 △한양대 전기공학과 졸업 △백석대 신학대학원 졸업 △아나돗학교 대표간사 △아나돗공동체 위임목사 △세이프타임즈에 '노희(路戱)와 더불어 책(冊)놀이' 연재, 칼럼집 <아나돗편지(같이 비를 맞고 걸어야 평화가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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