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이신 논설위원·목사
▲ 정이신 논설위원·목사

은행이 필요한 이유는 여러 가지지만, 갑작스럽게 목돈이 필요한 경우 은행의 대출 기능은 아주 요긴합니다. 그런데 대출받았을 때는 내 돈이 아니기에, 이자를 주거나 은행에서 요구하는 담보를 제공해야 합니다. 이는 경제적으로 부담되는 일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수시로 적은 돈을 은행에 모아뒀다가, 목돈이 필요할 때 찾아 씁니다. 이는 내 돈을 찾아 쓰는 일이기에 이자를 물지 않아도 됩니다.

동양학에서 사람이 자기에게 주어진 길을 바꾸는 최고의 덕목으로 여기는 적덕(積德)은 내가 은행에 수시로 저금했다가 목돈이 필요할 때 찾아 쓰는 것처럼, 덕을 가꾸거나 쌓는 일입니다. 그런데 덕은 내가 한 일을 남들이 알아줬을 때만 쌓이는 게 아닙니다. 내가 좋고 바른 일을 했지만, 남들이 이해하지 못하거나 반대할 때도 덕은 쌓입니다.

좋은 일을 했다고 다른 사람들이 인정해주고, 남들이 내게 고마움을 표현할 때만 덕이 쌓이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지만, 삶에서는 이와 반대의 경우에 쌓는 덕이 더 큽니다. 그 일이 올곧아서 다른 사람에게도 도움이 되는 일이지만, 이권을 독점하려는 무리에게 공격당하면서도, 선으로 악을 이기며 그 일을 수행했을 때 더 큰 덕이 생깁니다.

그래서 적덕을 어느 정도 했으면 수덕으로 넘어가야 합니다. '수덕(修德)'이 아니라 '수덕(守德)'인데, 예화를 통해 설명해 보겠습니다. 대안학교를 운영하면서 제가 할 수 없는 일까지 도와달라고 요구하는 사람에게 그건 제 생각과 다르다고, 제가 할 수 없는 일이라고 거절했었습니다. 그랬더니 갑자기 태도를 바꿔 저를 공격했던 모습을 여럿 봤습니다. 또 그동안 도움을 받았으면서도 갑자기 제가 할 수 없는 일을 요구한 뒤, 그것에 응하지 않으니까 태도를 바꾸는 사람을 기독교상담을 하면서 많이 만났습니다.

이럴 때 필요한 게 수덕으로, 이는 내가 가꿔 온 덕을 지키는 것입니다. 이런 일을 겪게 됐을 때 '그동안 내게 받은 도움이 있는데,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라고 마음을 조율하지 못하면, 설화(舌禍)에 휘말리게 되고, 그동안 쌓은 덕이 헝클어집니다. 그래서 적덕한 뒤에는 반드시 덕을 지키려는 노력도 기울여야 합니다.

후한 때 허신(許愼)은 "설문해자(說文解字)"에서, "밖에서 사람이 바람직하고 안에서 내게 얻어진 것"이 덕이라고 했는데, 덕의 고자인 '悳(덕)'을 파자하면 진실하고 바른 마음이 덕입니다(直+心). 또 현대에 쓰고 있는 '德(덕)'을 파자하면 바른 마음으로(直心) 서두르지 않고 조금씩 걷는 게(彳: 조금 걸을 '척') 덕입니다. '조금씩 걷는다'란 말은 덕을 쌓는 일이 빨리 진행되지 않기에, 서두르며 덕을 쌓으려고 하지 말라는 권고입니다. 그래서 저는 덕을 '사람의 마음을 얻는 것'으로 봅니다(得+心).

사람이 덕을 쌓기 위해 옳은 길(直)로 가서 바른 마음으로(心) 천천히 그리고 조금씩 걸으면(彳), 다른 사람들에게 오해를 사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때는 가꾼 덕을 잘 지켜야 하고, 덕을 잘 지키려면 남에게 인정이나 칭찬을 받으려는 태도를 과감하게 버려야 합니다. 내가 예전에 했거나 지금 하는 일이 타인을 위한 게 아니라, 내가 하나님 앞에 갔을 때 부끄럽지 않기 위해서 한 것이기에, 다른 사람의 비판과 훼방에 마음을 두면 안 됩니다. 그러면 적덕에 머무르게 되고, 수덕으로 나아가지 못합니다.

적덕은 가공하지 않은 원자료에 해당하기에 여러 가지가 섞여 있는데, 자료를 가공하면 정보(情報)가 되듯이 적덕을 가공하면 수덕이 됩니다. 적덕에서 수덕으로 변환돼야 비로소 덕이 내 삶의 질을 바꾸고, 구원을 위해 좋고 아름다운 가치를 발휘합니다. 게다가 우리가 사는 해 아래 세상은 내가 좋은 덕을 쌓도록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고, 수시로 온갖 일을 일으켜 방해합니다. 그러니 그동안 쌓은 덕이 많다고 방심하지 말고, 반드시 적덕을 수덕으로 변환해 둬야 합니다.

■정이신 논설위원·목사 △한양대 전기공학과 졸업 △백석대 신학대학원 졸업 △아나돗학교 대표간사 △아나돗공동체 위임목사 △세이프타임즈에 '노희(路戱)와 더불어 책(冊)놀이' 연재, 칼럼집 <아나돗편지(같이 비를 맞고 걸어야 평화가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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