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이신 논설위원·목사
▲ 정이신 논설위원·목사

예전에 남북교류를 증진하는 차원에서 북한의 작가가 쓴 황진이에 관한 소설이 우리나라에 소개된 적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분단 전에 우리나라에서 꽤 유명한 소설가의 손자였는데, 북한에서도 할아버지의 영향으로 대우를 받았고 소설가까지 됐습니다.

그런데 그때 아쉬웠던 건 그 소설의 구성입니다. 소설도 사람의 해석을 담은 글인지라, 그 소설을 쓴 사람이 해석한 황진이가 썩 마음에 내키지 않았습니다. 북한에서 대우를 받으며 살던 사람이 쓴 글이기에, 그가 보여준 황진이를 해석한 틀에는 유리 천장이 여러 겹 씌워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북한의 작가가 쓴 소설이 공식 절차를 거쳐 우리에게 소개됐기에, 역으로 우리의 작품도 북한에 소개될 날이 오기를 은근히 기대했습니다. 그 일을 계기로 남북한이 공동으로 작업하는 우리말 사전 편찬과 같은 일도 진행되기를 바랐습니다.

그 일은 남북저작권 분쟁의 해결사례이기도 했습니다. 처음부터 북한과 저작권을 협의하지 않고 그 소설을 우리나라의 출판사에서 출간했었는지, 저작권 분쟁이 법원의 조정 결정으로 정리됐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 나름대로 절차를 거쳐 출간한 최초의 북한소설이면서, 북한에 공식적으로 인세를 지급한 소설이 됐습니다. 게다가 그 소설에 모 단체에서 문학상까지 줬는데, 이게 정치적 판단인지 문학적 판단인지 여러 가지 뒷말이 있었습니다.

그때는 제가 북향민을 가르치지 않았던 때였기에, 이 소설에 관한 여러 가지 소식을 접하면서도 한편으로 긴가민가했습니다. 고등학생 때 월북한 시인들의 작품을 배우지 못했던 기억이 되살아나기도 했고, 남북한이 같은 언어를 쓰니 '더 큰 그림이 그려질 것'이란 희망의 모닥불을 지펴보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북향민을 만났고, 2017년까지는 북한에서 살고 있었지만, 그 후에는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는 작가명 반디가 쓴 소설을 읽었습니다. 황진이에 관한 소설과 다른 울림이 그의 소설에 담겨 있었는데, 반디라는 필명이 말해주듯이 그가 지금까지 살아있는지 죽었는지 모릅니다. 또 그에게 저작료가 어떤 경로를 통해 지급됐는지도 베일에 가려져 있습니다.

반디가 쓴 소설에는 제가 북향민을 통해 알게 됐고 염려했던 이야기의 파노라마가 펼쳐져 있습니다. 그래서 소설 내용에 충격받은 게 아니라, 이들이 앞으로 우리가 같이 살아야 할 동족이라는 사실이 더 무겁게 다가왔습니다. 이들을 두고 우리만 잘 산다고 할 수도 없지만, 이들이 그동안 견뎌왔던 사회상과 그게 만들어 놓은 이들의 심리상태를 우리가 온전히 이해하려면, 꽤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았습니다.

남북으로 나뉘었지만 같은 말을 하고 같은 글자를 쓰며 한반도의 반쪽을 차지해서 살고 있기에, 저는 이들을 같은 민족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북향민을 10여 년을 넘게 만나 보니, 같은 민족이지만 다른 게 너무 많습니다. 그래서 잘 섞이지 않는 두 개의 색깔을 인정하고, 이들과 어울리는 법을 익히는데 꽤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제가 만난 이들은 북한을 떠나 대한민국으로 온 사람들이고 비교적 젊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남한에 정착하는데 기본적으로 3∼5년이 걸렸다면, 이들처럼 유연하지 않은 다른 세대의 북한 사람들은 어떨까요. 통일이란 말을 겉으로만 듣기 좋게 떠드는 정치인을 보면, '그 꿈이 저런 구호로만 가능할까'란 두려움이 치솟습니다.

설득은 말과 글로 하지만, 내가 가진 생각도 없이 다른 이가 써준 것만 읽으면 상대가 설득되지 않습니다. 또 상대를 설득해도, 같이 길을 가는 이들끼리 공유하는 희망이 있어야 공동체가 만들어집니다. 그래서 설득은 인간이 해도 희망은 인간이 줄 수 없다고 합니다.

북향민과 공유할 수 있는 희망에 천착해서, 이걸 자기 것으로 만든 사람이 많아져야 합니다. 그렇게 돼야 하나님이 주신 통일이란 희망이 주변에 퍼지기 시작합니다. 통일은 하나님이 이런 이들을 통해 이뤄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정이신 논설위원·목사 △한양대 전기공학과 졸업 △백석대 신학대학원 졸업 △아나돗학교 대표간사 △아나돗공동체 위임목사 △세이프타임즈에 '노희(路戱)와 더불어 책(冊)놀이' 연재, 칼럼집 <아나돗편지(같이 비를 맞고 걸어야 평화가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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