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이신 논설위원·목사
▲ 정이신 논설위원·목사

밝음과 어둠, 흑과 백, 승자와 패자, 힘 있는 자와 없는 자가 뚜렷이 나뉘면서도 공존해야 하는 세상을 해 아래에서 우리는 꾸려가고 있습니다. 또 이로 인해 이질적 관계가 뚜렷이 나뉘는 현실을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흐름에 젖어 살다 보니, 내가 살기 위해 남을 이겨야 하는 경쟁의 질서에 따라 모두가 투사가 되기도 합니다.

이게 지나쳐서 굳이 싸울 필요가 없는데도, 가상의 경쟁자를 만들어 싸움을 벌이는 이들이 있습니다. 또 이런 싸움을 즐기는 사람들은 경쟁자가 없는 삶은 무의미하고, 맛이나 멋이 없기에 가상의 경쟁자라도 만들어야 사회를 제대로 운영할 수 있다고 합니다. 이런 호전 중독 현상은 의외로 넓게 퍼져 있는데, '중독'이란 표현처럼 필요하지 않은 것까지 적으로 만들어 놔야 일이 진행되는 현실이 참 안타깝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걸 '투사중독증'이라고 합니다.

이기기 위해, 남보다 앞서기 위해 공부와 일을 열심히 해야 합니다. 또 좋은 학교로 진학하거나 직장에 취직해야 하고, 남보다 1㎜라도 앞서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자기에게 늘 강요합니다. 그러다 보니 같은 직장에 다니고, 서로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관계인데도, 그와 우정을 나누기보다는 그를 경쟁상대로만 인식합니다. 대입 앞에서는 같이 수업을 받았던 아주 친한 친구마저도 단순하고 치열한 경쟁자로 전락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살아 보니 문제가 생겼습니다. 삶의 에너지를 모두 소진할 만큼 자기를 채찍질하며 살았지만, 생각했던 것만큼이나 다른 사람들보다 저만치 앞서가고 있지 않았습니다. 늦었다고, 그를 따라잡아야 나도 살 수 있다고, 허겁지겁 바삐 움직이며 살았는데도, 그 바람대로 다른 사람들보다 조금도 앞서고 있지 않았습니다. 때로는 내가 서두른 것보다 더 빠르게 움직여서, 나를 앞서 있는 그들을 발견하게 됐습니다.

그들을 보면서, 그동안 잠시나마 내가 앞섰다고 생각한 건 착각과 강박관념에 사로잡힌 허상이란 걸 알게 됐습니다. 돌아보니 도개걸윷모 다섯 가지나 있는 윷판에서 모 아니면 도라는 흑백의 이진법과 양자택일을 내게 강요한 결과물을 들고서, 그게 승리를 쟁취한 자가 누릴 불에 타고 있는 잔의 몫이라고 저 혼자 흥청망청 마셔대고 있었습니다.

종교계는 이러면 안 된다고 말하지만, 종교적 절대자마저 오직 나와 저들만을 위해 존재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저들은 시대적 유행에 따라 종교를 가지고 있으면서, 종교가 제시하는 모든 복락은 오직 저들만을 위해 존재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동안은 사이비·이단 교주들이 이런 말을 잘했었는데, 요즘은 정통이라 불리는 일반 종교인 중에서도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보편 종교에 소속돼 있으면서도 사이비·이단과 같은 행적을 보이는 저들은, 종교가 제시하는 복락을 경쟁적으로 쟁취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인생의 그래프가 내려갈 때도 있는데, 잠시 내리막길을 간다고 해서 실패한 게 아니라는 걸 알려주는 가르침이 종교인데, 저들은 그것마저도 경쟁적 가치로 바꿔, 표면상의 수치가 올라가야만 복락을 얻은 것이라고 합니다.

수직이란 수평과 더불어 존재해야 공고해지고 탄탄해지기에, 왼손 없는 오른손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 사회에 경쟁이 필요하고, 그것으로 만들어진 질서를 무시할 수 없지만, 그게 삶을 유지하기 위한 최고의 미덕은 아닙니다. 때로는 협조와 우정의 가슴으로 상대를 포용해야 합니다.

이는 경쟁을 무시하는 게 아니라, 그것의 한계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일례로 가족끼리 마주 대하는 밥상의 아름다움은 경쟁적인 질서로 얻어낸 것만으로 차려지지 않습니다. 경쟁이 필요하지만, 포용과 우정이 없는 경쟁은 출발선이 다른 절름발이 사회를 만들 뿐입니다. 포용력으로 다듬어진 마음을 경쟁력과 함께 갖추고 있어야, 우리가 지금보다 더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들 수 있습니다.

■정이신 논설위원·목사 △한양대 전기공학과 졸업 △백석대 신학대학원 졸업 △아나돗학교 대표간사 △아나돗공동체 위임목사 △세이프타임즈에 '노희(路戱)와 더불어 책(冊)놀이' 연재, 칼럼집 <아나돗편지(같이 비를 맞고 걸어야 평화가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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