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이신 논설위원·목사
▲ 정이신 논설위원·목사

민족단체에서 사무차장으로 근무할 때 얼굴을 익힌 사람이 있습니다. 그 단체는 삼일운동과 독립운동가들을 기억하고, 독립을 위해 헌신하신 분들이 남긴 정신을 함양하는 사업을 위해 설립했던 NGO로, 지금은 해산하고 없습니다. 그 단체의 주요 활동사업이 삼일운동이 선언한 정신을 계승해 일본을 넘어서는 전망대를 갖추는, 극일(克日)하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종교와 이념을 떠나 다양한 색깔을 가진 사람들이 어울리며 관련 사업을 같이 진행했었습니다.

그 단체에서 일하다가 사정이 생겨서 거기를 그만두고 목사 안수를 받았습니다. 그러자 특정인을 메시아로 추종하는 사람이 제게 개인적으로 연락하는 일이 잦아졌습니다. 그는 어떤 성씨를 가진 사람을 이 세상을 구원할 사람이라고, 세계평화운동을 벌인 사람이라고 떠받드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추종하는 곳에서 하나님의 뜻이라고 일본인과 결혼한 그는 특이한 행적을 그리며 살았습니다. 그렇지만 그건 그가 선택한 길에 얽힌 그만의 몫이기에, 궁금했던 건 목사가 된 제게 카톡을 계속 보내는 의도였습니다. 제가 민족단체를 그만뒀고, 그가 추종하는 곳을 기독교에서는 사이비·이단이라고 하는데, 목사가 되자 계속 카톡을 보내는 이유가 궁금했습니다.

그는 그가 추종하는 곳에서 만든 모 신문사에서 한동안 기자로 일하다가, IMF 이후 머리를 빡빡 깎은 채 그 신문사를 그만두고 잡지사를 하나 차렸습니다. 그러더니 특정 세력과 연대해서 근근이 목에 풀칠하며 살았습니다. 돈은 있으나 저들이 직접 쓴 글이 없는 사람들을 위해, 대필해서 저들의 행적을 미화하는 글을 그가 발행인으로 있는 잡지에 싣고, 저들에게 그 잡지를 파는 식으로 생계를 꾸렸습니다.

그랬던 그에게서 제게 개인적으로 카톡이 오기 시작했습니다. 한 번은 카톡이 왔다고 알리는 소리가 너무 귀찮아서, 'NO.'라고 답장을 보낸 적이 있습니다. 그랬더니 다시 장문으로 답장이 왔습니다. 안 되겠다 싶어서 그 뒤로는 그에게서 오는 카톡 알림을 모두 무음으로 처리한 뒤 무시했고, 그가 보낸 카톡에 답장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메시아라고 추앙하는 사람의 집안에서는 지금도 집안싸움이 한창입니다. 아들이 엄마를 음녀(淫女)라고 공개적으로 비판하고, 형제끼리는 서로 자기가 아버지의 사상을 승계했다고 으르렁대며, 가족 안에서는 서로가 이단이라고 정죄합니다. 또 그가 메시아로 추종하는 사람의 부인은 남편이 살아 있을 때 주장했던 말을 부정합니다. 그런데도 그는 제게 줄기차게 카톡을 보냅니다. 이런 그를 보면서, '사람이 먹고살기 위해 생각을 시멘트처럼 굳히면, 모든 게 그렇게 보이는 모양이구나'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는 제게 개인적으로 카톡을 보내면서, 메시아로 추종하는 사람에 대해서도 여전히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고 줄기차게 말합니다. 또 해 아래 세상의 흐름에 대해서도 예전처럼 이중 잣대로 해석하는 걸 견지합니다. '수구가 한 일은 무조건 옳고, 보수가 한 실수는 보수가 잘한 일이 더 많으니 관용을 베풀어야 하며, 진보는 무조건 잘못했다.'

사람이 이렇게도 바뀌지 않는 막무가내의 동물이라는 걸 그를 통해 다시 알게 됐습니다. 사람은 먹고살기 위해 기억마저 선택적으로 되살려내는, 철저하게 자기 주도적이고 이기적인 존재라는 걸 그를 통해 다시 배웠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만 그런 문제를 지닌 인간이 아니라, 그와 인연을 맺었던 저도 비슷한 인간이 될 수 있는 소지가 있습니다. 그래서 생각이 꽉 막힌 그의 모습을 통해 저를 성찰하고 있습니다.

그가 준 타산지석의 교훈으로 저를 보기 위해 기도하면서 성경을 읽고, 책을 봅니다. 또 때로는 제가 속한 신앙공동체에 묻거나, 전문가에게 조언을 구합니다. 스승이 없다는 게 좋은 게 아니고, 스스로 바보라고 인정하는 꼴이기에 멘토도 찾아갑니다. 저도 그처럼 선택적으로 과거를 기억하고 있지 않은지 살피기 위해서 늘 이렇게 합니다.

■정이신 논설위원·목사 △한양대 전기공학과 졸업 △백석대 신학대학원 졸업 △아나돗학교 대표간사 △아나돗공동체 위임목사 △세이프타임즈에 '노희(路戱)와 더불어 책(冊)놀이' 연재, 칼럼집 <아나돗편지(같이 비를 맞고 걸어야 평화가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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