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생 끝에 빛을 보는 SK하이닉스가 현대그룹에서 출발했다는 것을 아는 젊은 세대는 많지 않다. SK하이닉스가 얼마나 많은 시련을 겪고 오늘의 성공에 이르게 되었는지 고난의 세월을 살펴보면 한 기업의 성공에 얼마나 많은 주변의 도움이 있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1983년 고 이병철 회장의 결단으로 삼성전자는 우리나라에서 처음 D램 사업에 뛰어들었다. 불과 6개월 만에 64K D램을 개발한 삼성전자는 국내외 반도체 인재를 영입하고 반도체 불황에도 굴하지 않는 대규모 투자를 단행했다. 1992년 64M D램을 앞세워 메모리 시장 세계 1위를 달성한 이후 현재까지 그 지위를 빼앗기지 않는 국내 기업사에 유래없는 성공의 길을 걷게 된다.
재계 라이벌이던 현대그룹의 '왕회장' 고 정주영 회장도 이에 자극을 받고 전자산업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그는 1983년 2월 현대종합상사의 전자사업부를 분리해 현대전자산업을 설립했다. 1985년 반도체 산업에도 뛰어들었다.
불과 2~3년의 차이였지만 국내 모든 자원을 선점한 삼성전자의 아성을 넘기는 쉽지 않았다.
전자업계 라이벌 LG전자도 LG반도체를 설립했다. 막대한 투자비가 소요된 반도체 산업의 중복 투자는 IMF 경제 위기를 맞은 우리나라 경제에 큰 부담이 됐다.
결국 정부는 '빅딜'이라는 명목으로 구조조정을 단행했다. 1999년 현대전자산업은 2조5600억원에 LG반도체를 합병하고 하이닉스로 회사 이름을 바꿨다.
하지만 2000년 초 불어닥친 반도체 불황에 합병 시너지가 나타나기도 전에 유동성 위기에 빠진다. 2001년 정주영 회장의 사망과 하이닉스를 승계했던 정몽헌 회장의 2003년 자살은 지배구조의 공백도 초래했다.
재정적 어려움에 빠진 하이닉스는 채권은행단에 손을 벌리고 10조원이 넘는 채무 면제와 유예를 받았고, 반대 급부로 현대 그룹은 경영권을 잃었다. 대규모 투자금이 소요되는 하이닉스의 커다란 실패를 목도한 국내외 기업 가운데 하이닉스를 인수하고자 나서는 곳은 좀처럼 나타나지 않았다.
2012년에 가서야 SK그룹이 그 위험을 떠안았다. SK 그룹은 반도체 산업 기반이 없었지만 통신과 에너지 사업에서 축적한 자본이 있었다. 삼성전자를 당장 따라잡기는 어려웠지만 지속적인 기술 투자를 진행할 여력이 있었던 것이다.
SK하이닉스에게 찾아온 기회는 우연에 가까웠다. 세계 1위 기업 삼성전자의 위기가 그것이다. 이건희 회장이 사망하고, 이재용 회장이 경영권을 승계했지만 여러 법적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잠시 흔들렸다.
삼성전자는 인공지능 시대에 각광을 받는 새로운 반도체인 HBM 대응에도 실기했다. 이때 SK하이닉스는 삼성전자 인력을 많이 수혈하게 된다. 선두 업체를 따라잡으려는 절박감에다 선진 기술을 보유한 인력이 가세하니 HBM 개발은 거칠 것이 없었다.
2024년 3분기 SK하이닉스는 분기 실적으로 삼성전자를 뛰어넘는 기염을 토했다. 있을 수 없을 것 같던 일이 현실이 됐다.
반도체 산업은 6개월의 기술력 차이도 뛰어넘기 힘들다. 예전 삼성전자가 보여줬던 초격차를 이제는 SK하이닉스가 보여주고 있다.
고생 끝에 낙이 온 것이며, 늦게 핀 꽃이 더 아름다운 격이다.
하지만 오늘의 SK하이닉스의 성공은 SK하이닉스 스스로의 힘만으로 이뤄낸 것이 아님을 명심해야 한다.
'빅딜'을 주도한 정부, 채무를 면제해 준 채권은행단, 우리나라 반도체 산업을 세계 1위로 끌어올린 삼성전자가 구축한 반도체 생태계가 그 기반이었다.
당장의 성공에 샴페인을 터뜨리지 말고 겸손한 자세로 기술 변화가 빠른 미래에 대비해 더욱더 성공하기를 기대한다.
■ 안경희 세이프타임즈 논설위원·경제금융연구소장 △경영학박사 △서강대 경제대학원 대우교수 △나사렛대 경영학과 객원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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