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태주가 쓴 시 '틀렸다'를 읽었습니다. 그는 시에서 돈, 명예, 미모, 권력을 가지고 잘 살기는 틀렸다고 노래했습니다. 공자님이 시경을 한 마디로 평가해 '사무사(思無邪)'라고 했는데, 누구에게나 공평한 시간과 선택을 통해 "스스로 아름다운 사람이 될 것이다"고 노래한 그의 시가 틀린 것이 아니라 다른 것만은 확실합니다.

틀린 길을 가면 두렵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이미 틀렸다고 여러 차례 검증을 통해 확인한 길을 맞다고 혼자 주장하면서 가려면 힘이 듭니다. 그래서 틀린 길을 가는 사람들은 대부분 혼자 가려고 하지 않고 사람들을 유혹해 같이 갑니다.

이는 사이비ㆍ이단 교주들에게서도 흔하게 볼 수 있는 모습입니다. 저들은 자신들이 맞다고 주장하지만 실제로는 틀린 길을 혼자 가지 않고 사람들을 속여서 같이 데리고 갑니다.

틀린 길과 다른 길은 완전히 별개입니다. 틀린 길은 그 길을 가는 사람이 틀리지 않다고 변명하고 다른 길은 그 길을 가는 사람이 처음부터 다르다고 합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그 길이 자신이 가고자 했던 길이라고 하면서 그 길로 옵니다.

즉 틀린 길은 나만 그 길이 꼭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길이고 다른 길은 그런 길도 우리 사회에 꼭 필요하다고 여럿이 인정하는 길입니다. 그래서 틀린 길은 지속적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몇 세대가 지나면 자연스레 "그런 길이 있었다", "그런 길로 가면 안 된다"는 역사적 교훈만을 남긴 채 사라집니다. 반면 다른 길은 좁은 길로 이어지며 필요를 인정한 사람들이 나타나 끝없이 길의 생명이 연장됩니다.

▲ 정이신 아나돗학교 대표간사ㆍ아나돗공동체 목사

세상이 갈수록 복잡해지고 있는데 복잡성을 다 담기 위해 길은 자연스레 넓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단순하고 좁은 길을 통해 더욱 자유로워지고 진실에 가까이 갈 수 있기에 넓은 길로 다니면서도 늘 단순하고 좁은 길을 희구합니다.

따라서 끊임없이 다른 길과 좁은 길을 찾아내서 넓은 길에 더 많은 생명이 차고 넘치도록, 넓은 길이 여럿이 같이 가는 아름다운 길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또 처음에는 다른 길이 좁은 길이었는데 차츰 넓은 길이 될 때도 있습니다.

이럴 때는 반드시 구별된 차선처럼 그 안에 다르고 좁은 길을 만들어 넓은 길에 숨길을 내줘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초심을 잃어 처음의 흐름이 약해지거나 흐려집니다.

서양에서 국왕은 다른 인간들처럼 사멸하는 자연적 신체는 물론 영적 신체도 보유한 존재였습니다. 그래서 왕이 개인적 악행을 저지르더라도 왕의 직책은 신성한 것이니 처벌할 수 없다는 왕권신수설이 나왔는데, 이 설을 오늘날 사이비ㆍ이단 교주들이 자신들의 비윤리적 행위를 변명하는데 사용합니다. 이들과 달리 좁은 길에 들어서 있는 진짜 신앙인들은 서로 다른 정신과 육체를 두 개 가질 수 없고 오직 하나의 몸을 갖습니다.

좁은 길은 넓지 않기에 영적 신체와 자연적 신체로 구분된 두 개의 몸이 갈 수 없고 하나의 몸으로만 갈 수 있습니다. 하나의 몸이기에 모든 순간이 하나님이 허락하신 은혜의 보석이고 아름다움이며, 고통과 슬픔입니다. 좁은 길에서는 십자가의 고통과 부활의 영광이 같습니다.

그런데 이 길은 현재가 아니라 미래에 속하기에 현재의 눈으로는 길의 진위를 검증하기 힘듭니다. 오직 부활의 미래가 주는 눈으로만 이 길의 진위와 가치를 검증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한반도의 통일을 준비하는 눈으로 봐야 남과 북이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부터 그 길로 같이 걸어보시지 않으시렵니까.

■ 정이신 논설위원ㆍ목사 = 한양대 전기공학과와 백석대학교 신학대학원을 졸업했다. 한국독립교회 및 선교단체연합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아나돗학교 대표간사와 아나돗공동체 목사다. 독서와 글쓰기를 주제로 한 <노희(路戱)와 더불어 책(冊)놀이>를 연재했으며 논설실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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