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에서 제자가 스승에게 직접 배우는 과정을 친자(親炙)라고 하는데, 맹자는 공자님에게 직접 배우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공자님의 사상에 매료돼 그분을 스승으로 삼고 공부를 해서 일대(一代)를 이뤘습니다. 공자님이 맹자를 직접 가르치지 않았다는 비판에 응대해 그는 공자님을 사숙(私淑)했다고 했습니다.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제자이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스승입니다.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가 쓴 글과 달리 플라톤이 쓴 글을 보면, 말하는 이는 소크라테스이지만 실제 내용은 자신의 목소리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플라톤이 자신의 생각을 소크라테스라는 스승을 통해 드러낸 것이라고 보는 학자들이 많습니다. 이는 공자님과 맹자가 보여준 관계와 약간 다른 모습입니다.

맹자와 플라톤의 경우를 보면서 스승이 누구인가와 누구의 제자로 사는가가 일면 같은 맥락으로 이어지는 것을 봅니다. 플라톤의 경우 그가 쓴 글을 보면 '스승이 누구인가'가 중요했고, 맹자의 경우 '누구의 제자로 살아가는가'가 중요했습니다. 또 스승과 제자는 알지 못하는 끈이 작용해서 스승 사후(死後)에 서로 이어지기도 했습니다. 공자님은 자신이 직접 가르치지 않았던 맹자라는 제자가 나타날 것을 몰랐습니다. 소크라테스도 플라톤의 뒤를 이어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이가 나타나 유물론의 기초를 놓으리라는 것을 몰랐습니다.

▲정이신 아나돗학교 대표간사ㆍ아나돗공동체 위임목사

이를 보면 제자가 없다는 것이 좋은 것이 아니고 스승이 없다는 것은 더 안 좋습니다. 게다가 스승이 제자에게 주는 가르침의 말씀인 증언(贈言)도 없이 혼자 성장한 제자는 위험합니다. 기독교상담을 하면 꼭 사이비·이단 교주들이 자신들에게 특별한 스승이 없었다고 하거나, 성령님이 자신들에게 직접 계시를 주셨다고 합니다. 아니면 오직 예수님만이 자신의 스승이었다고 거짓말을 합니다.

기독교 신앙이란 선조와 후손을 통해 계승되는 것입니다. 신앙의 멘토 없이 예수님만이 자신의 스승이었다고 하면서, 자신은 자기를 이을 제자를 찾는 모습은 굉장히 이상합니다. 예수님의 부활 승천 이후 좋은 멘토나 길라잡이 선생님이 없는 기독교 지도자는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대안학교의 간사이기에 누군가의 멘토가 되기 위해 먼저 누군가의 제자가 돼야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로 출발했습니다. 그런데 살다보니 지켜야 할 항목이 참 많았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하나님의 나라라는 곳에 다녀와서 그곳의 이야기를 이 땅의 이야기로 번역해 줘야 합니다. '세계는 왜 존재하는가'라는, 인간이 세계를 만들지 않았기에 그 해답이 존재하는지 조차도 알 수 없는 이상한 문제와 끊임없이 씨름해야 합니다.

이 씨름을 통해 인생에 얽혀 있는 다양한 문법적 착오와 사고의 틀(frame)을 정제할 수 있는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들려줘야 합니다. 또 순물이 섞인 삶을 정제해서 주어진 시간에 집중해야 할 항목을 뭔지를 찾아내 알려줘야 합니다. 이들 눈으로 보면 과학도 자신의 궁극적 물음 속에서는 인문학적 해석에 합류할 수밖에 없습니다. 과학을 과학으로만 해석하려는 것은 철학이 따로 존재한다고 외치는 것과 같습니다.

칸트는 무한한 사색의 여정인 '철학함'만이 존재하지 철학은 별개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예수님 제자의 눈으로 보면 과학도 '과학함'만이 존재하지 과학이 따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인생도 내게 주어진 시간을 하나님의 은혜로 채워 살아가는 '살림살이'만이 존재하지 인생 그 자체가 따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것을 알아가기 위해, 살림살이 기간 동안 사람들이 집중해야 할 것을 찾기 위해 오늘도 씨름하고 있는 이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

■ 정이신 논설실장·목사 = 한양대 전기공학과와 백석대학교 신학대학원을 졸업했다. 한국독립교회 및 선교단체연합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아나돗학교 대표간사와 아나돗공동체 위임목사다. 독서와 글쓰기를 주제로 한 <노희(路戱)와 더불어 책(冊)놀이>를 연재했으며, 논설실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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