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성경을 기록한 언어는 히브리어와 아람어입니다. 구약성경의 대부분은 히브리어로 기록돼 있지만 다니엘서에 아람어로 기록된 부분이 조금 있습니다. 아람어는 신약성경에서도 몇 곳 쓰였는데, 예수님이 하셨던 말씀을 기록한 것 중에 아람어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어(死語)가 돼 있었던 고대 히브리어 대신 당시 이스라엘에서 공용어로 사용했던 아람어를 쓰셨습니다.

언어에는 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사고방식과 문화를 비롯한 갖가지 정보가 담겨 있습니다. 히브리어도 마찬가지입니다. 히브리어 동사에는 완료와 미완료만 있을 뿐 과거ㆍ현재ㆍ미래를 구분하는 시제가 없습니다.

야훼 하나님께는 시간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일을 매듭지었는지 아니면 아직 매듭짓지 않았는지만 인간이 헤아릴 수 있습니다.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신들의 언어체계 속에 하나님의 속성을 담고자 했습니다. 그들은 모든 인간사 뒤에는 하나님의 개입이 있다고 생각해서 동사를 시제 없이 완료와 미완료로만 구분했습니다. 우리말로 이를 번역할 때는 문맥에 따라 시제를 결정하는데 완료는 과거와 현재, 미완료는 미래로 번역합니다.

▲ 정이신 아나돗학교 대표간사ㆍ아나돗공동체 위임목사

"좁은 문으로 들어가거라. 멸망으로 이끄는 문은 넓고 그 길이 널찍해서 그리로 들어가는 사람이 많다(마태복음 7:13)." 

사람들은 이 말씀을 읽으면서 좁은 길을 가지 못하는 사람을 비웃거나 비판합니다. 그런데 <누가복음 13:24>을 보면 같은 말씀을 약간 다르게 기록했습니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써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들어가려고 해도 들어가지 못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이를 보면 좁은 문은 단지 인간의 의지와 노력으로만 들어 갈 수 있는 문이 아닙니다.

저는 길에도 시제(時制)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넓은 길은 이미 사람들이 많이 다니고 있기에 미래가 될 수 없고 현재나 과거입니다. 좁은 길은 아직 사람들이 많이 가지 않아서 좁은 것이기에 미래입니다.

그런데 미래는 인간이 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열어주셔야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예쁜 미래로 가는 좁은 길은 내가 지닌 의지와 결단으로만 갈 수 없습니다.

좁은 문은 좁은 길과 필연적으로 이어져 있기에 이 문도 미래에 속합니다. 따라서 미래를 보는 눈을 얻지 못하면 좁은 문과 길이 어딘지 알 수 없습니다.

인간사에서 미래는 내가 계획하고 준비해서 열어가는 영역도 있지만, 하나님이 주시고 역사가 내게 일방적으로 요구하는 영역이 있습니다.

그 영역은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주어지는 것이기에 내가 바꿀 수 없고, 순종함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기독교의 경우 예수님이 부활하신 이후 성령님이 강림하시자 제자들은 성령님이 주신 미래의 눈을 갖게 됐습니다. 그래서 그 눈으로 복음과 부활하신 예수님의 가치를 새롭게 보게 됐습니다.

좁은 문과 길은 두렵거나 깨닫지 못해서, 용기가 없어서 가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보여주시지 않고 역사가 허락하지 않아서 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의지가 약해서 좁은 문과 길로 가지 못했다고 비판할 필요가 없고, 그 길을 가지 못한다고 나약하다거나 비겁하다고 가시 돋친 대응을 할 필요도 없습니다.

통일은 좁지만 예쁜 미래입니다. 그래서 통일된 아름다운 한반도를 볼 수 있는 미래의 눈을 얻은 사람들만이 통일비용의 두려움보다 통일투자의 가치를 먼저 말합니다.

■ 정이신 논설실장ㆍ목사 = 한양대 전기공학과와 백석대학교 신학대학원을 졸업했다. 한국독립교회 및 선교단체연합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아나돗학교 대표간사와 아나돗공동체 위임목사다. 독서와 글쓰기를 주제로 한 <노희(路戱)와 더불어 책(冊)놀이>를 연재했으며, 논설실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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