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공(子貢)이 공자(孔子)에게 "한 마디로 평생토록 실천에 옮기며 살 수 있을 만한 덕목이 무엇이냐"고 묻자 '서(恕)'라고 했습니다. 

용서(容恕)란 상대방이 자기의 잘못을 깨닫고 나에게 사과했을 때에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미래에 임할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서 그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배신은 상대적인 면도 있습니다. 그가 나를 배신하기 이전에 나도 내 욕심에 빠져 하나님을 등졌기에, 그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 하는 것이 용서입니다.

그가 알든 알지 못하든, 그가 사이비ㆍ이단 교주와 같이 예수님을 빙자해서 사람의 영혼을 장사 품목으로 취급하는 '바벨론의 영혼 장사꾼'(요한계시록 18:13)이 아니라면 내가 살기 위해 하는 것이 용서입니다. 나 역시 아무런 조건 없이 예수님의 십자가로 용서 받은 존재이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자신의 과오를 알지 못하는 그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 용서해야 합니다. 어차피 그는 그렇게 생각할 줄 모를 수도 있습니다. 그가 제대로 안다면 그렇게 행동하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설령 안다고 해도 그는 사과할 용기가 없는 사람이기에 사과를 못할 수도 있습니다. 오히려 용서할 수 있는 용기가 있는 내가 먼저 다가가야 합니다. 용기 없는 그의 삶이 아닌 평화로운 나의 삶을 위해서 내가 먼저 각오를 다져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갔을 때 그를 용서하지 못한 부끄러움을 만들지 않기 위해서 용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미래를 보는 부활의 눈이 필요합니다. 부활의 눈이 없으면 용서가 되지 않습니다. 그가 정식으로 사과를 한 것도 아닌데 왜 내가 먼저 용서를 해야 하는지 궁금증만 생기고, 화만 납니다. 그래서 부활의 미래를 보는 눈이 필요합니다.

용서를 구했는데 상대가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다고 용서하기를 거부하면, 내가 할 수 있는 데까지 최선을 다해 용서를 구하고, 안 받아주면 그냥 기다리십시오. 용서를 구한 횟수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내가 진심으로 뉘우치고 있고, 그래서 그에게 용서를 구했는데도 그가 받아들일 준비가 안 되어 있다면 기다려야 합니다. 이미 그때부터는 내 몫이 아니라 상대의 몫입니다.

정이신 아나돗학교 대표간사ㆍ아나돗 공동체 목사

복잡한 가정사 때문에 어머니가 다른 형들과 같이 살았습니다. 집안에 어머니가 다른 형이 둘 있는데 그 형들의 어머니도 서로 달랐고, 이 가운데 한 명은 벌써 병으로 유명을 달리했으니 복잡해도 한참 복잡한 집안입니다. 그렇지만 부모님이 모두 돌아가실 때까지는 그럭저럭 형, 동생하면서 별 탈 없이 지냈습니다. 부모님이 모두 돌아가신 후 아버님이 남기신 땅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어머니가 같은 형과 다른 형 둘이 짜고 이것을 모두 자신들의 몫으로 가져가 버렸습니다. 막내인 저를 비롯해서 철저하게 가족을 모두 속였습니다. 몇 푼 되지 않는 땅이고 보상 받기 위한 법적 절차가 어렵다는 식으로 형제들에게 거짓말을 한 후 서류를 꾸몄습니다.

누나로부터 소식을 전해 듣고 멍해졌었습니다. 고향에서 유지 소리를 들으며 꽤 많은 부를 축적한 형이 꼭 목사로 사는 막내까지 속여야 했을까 한참을 생각하며 기도하다가 그냥 결론을 내렸습니다. 제 복이 아닌 것을 어떻게 합니까. 아, 무슨 결론을 내렸냐고요. 어떤 기도 응답이 왔냐고요. 여러분의 상상에 맡기겠습니다.

■ 정이신 논설위원ㆍ목사 △한양대 전기공학과 졸업 △백석대학교 신학대학원 졸업 △한국독립교회 및 선교단체 연합회 목사 안수 △아나돗학교 대표간사ㆍ아나돗 공동체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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