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으로 세상읽기] '끝나지 않은 성차별' 위계 무너뜨린 히로인 소환하다
[그림으로 세상읽기] '끝나지 않은 성차별' 위계 무너뜨린 히로인 소환하다
  • 조경희 미술팀 전문위원
  • 승인 2020.09.13 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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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틸레스키 '홀로페르네스의 머리를 베는 유디트'
▲ 젠틸레스키 '홀로페르네스의 머리를 베는 유디트(Judith Beheading Holofernes)', 1614~1620, 캔버스에 유채 ⓒ 우피치미술관 소장
▲ 젠틸레스키 '홀로페르네스의 머리를 베는 유디트(Judith Beheading Holofernes)', 1614~1620, 캔버스에 유채 ⓒ 우피치미술관 소장

무시무시한 살인의 현장. 주저함이나 두려움이란 단어를 이 그림에서 찾는 건 불가능해 보인다. 아직 남자는 살아있다. 하지만 맹수에게 잡힌 사냥감의 운명이 그렇듯 여인은 사내를 살려 줄 의지가 1도 없어 보인다.

남자의 이름은 홀로페르네스. 아시리아의 용맹한 장군으로 눈엣가시 같이 여기던 유대인을 위기에 빠뜨린 인물이다. 그의 조국에선 영웅일 수 있겠으나 유대인에게는 적국의 원수일 뿐. 적장의 머리채를 움켜쥔 채 결연하게 목을 베고 있는 여인의 이름은 유디트. 두 여인의 팔뚝에 이스라엘의 운명이 달렸다.

유디트는 성경의 외경(Apocrypha) 중 <유딧서(Book of Judith)>에 등장하는 주인공. 여성이지만 눈앞에 보이는 국가 존망의 위기에서 조국을 구하기 위해 적장 홀로페르네스를 유혹하고 하녀 아브라와 함께 그의 목을 베어 나라를 구한 여인이다. 이 주제로 수많은 화가들이 그림을 그렸지만 유독 젠틸레스키의 그림은 특별하다.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Artemisia Gentileschi, 1593~1620, 로마)는 초기 바로크 화가로 오늘날엔 바로크 미술의 거장 카라바조에 비교될 정도로 그 이름이 재평가되고 있다. 특유의 드라마틱한 빛이 만들어내는 극적인 명암 효과와 화면의 역동적인 구성은 젠틸레스키의 명성을 증명하는 동시에 바로크 미술의 전형을 보여준다.

"나는 여자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보여줄 것이다. 당신들은 카이사르의 용기를 가진 한 여자의 영혼을 보게 될 것이오."

젠틸레스키는 사회적으로 '강요당하는 여성성'에 대한 심리적 분노와 차별받는 부조리에 대해 강렬하게 반대하는 편에 서서 이의 부당함을 호소하는 그림을 주로 그렸다. 남성들에 의해 만들어진 성역할에 맞춰 살아야 했던 당시의 세태 속에서 이 작품은 단박에 논란거리가 됐다. 그러나 여성들은 카타르시스를 느끼며 깊은 공감의 눈으로 이 그림을 바라보지 않았을까.

▲ 카라바조,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치는 유디트(Judith Beheading Holofernes)', 1598~1599, 캔버스에 유채 ⓒ 베르베리니 궁전 국립고전회화관 소장
▲ 카라바조,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치는 유디트(Judith Beheading Holofernes)', 1598~1599, 캔버스에 유채 ⓒ 베르베리니 궁전 국립고전회화관 소장

남성 화가가 그려내는 세계는 여성 화가가 그려내는 그것과는 확연한 차이를 보여준다. 실제로 젠틸레스키는 카라바조가 그린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치는 유디트'를 보고 이 그림을 그리게 됐다. 하지만 이른바 '같은 옷 다른 느낌'처럼 그 차이가 극명하다. 카라바조의 그림에 등장하는 유디트는 적장의 목을 베고 있지만 왠지 주저하는 듯하고, 심지어 그 와중에 순수함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 순백색의 드레스를 입고서 '베이글 녀'  같이 귀여움과 글래머러스한 느낌을 동시에 풍기고 있다. 표정도 애매하다. 늙은 하녀도 소녀 같이 여리여리한 주인마님을 바라보고만 있을 뿐 수동적인 역할에 그치고 있다.

반면에 젠틸레스키는 살인 현장의 정황 연출에 임팩트를 뒀다. 그녀의 유디트는 전혀 예쁘거나 우아할 필요가 없다는 감독의 요구에 따라 연기하는 여배우처럼 저항하며 버둥대는 거대한 짐승을 적극적으로 제압하고 살육하는 캐릭터에 충실함으로써 카라바조의 유디트와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게다가 하녀마저도 이 거사의 성공을 위해 능동적으로 협력하는 모습으로 연출해 여성이 정의를 실행하는 히로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림 속 유디트가 젠틸레스키의 영혼이 투영된 자화상이라고 보는 관점이 무성한 것도 괜한 소리가 아닌 듯하다.

젠틸레스키는 이제까지 남성 중심적이었던 역사와 종교의 주제의 위계를 무너뜨린 최초의 여성이 됐다. 남성에게만 허락됐던 교육받을 권리를 '운 좋게도' 누린 젠틸레스키는 기꺼이 여성의 존재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 시키는 역할을 해냈다.

안타깝게도 그녀의 일련의 노력은 명맥을 잇지 못하고 잊혀져갔다. 그러다가 1970년대에 들어 여성주의는 다시 젠틸레스키를 주목하게 된다. 린다 노클린이 <왜 위대한 여성 화가는 없는가?>에서 여성의 재능 부족이 아니라 여성에 대한 차별이 그 원인이라고 지목하면서 젠틸레스키의 사례를 든 것이 그녀를 다시 이 세상으로 불러낸 것이다.

21세기인 작금에도 패미니즘이라는 단어가 심심찮게 화두에 오르고, 현재 우리나라에 여성가족부라는 기관이 존재하며,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양성평등이라는 것을 의무적으로 가르치고 있는 것을 보면 아직도 여성이 여성이라는 이유로 차별 속에 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17세기 바로크의 한 여성이 그림으로 자신의 목소리를 낸 것을 시작으로 느리지만 확실하게 양성평등이 이뤄진 세상을 향해 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지금도 어딘가에서 수많은 젠틸레스키들이 각자의 분야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것을 알기에 그러한 미래는 멀지 않았으리라.

■ 조경희 미술팀 전문위원 = 충북대학교 사범대학에서 미술교육학을 전공한 뒤 동 대학원에서 미술교육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충북 단양군에서 교편을 잡은 뒤 미술교사로 재직하는 동안 충북대학교 미술학과에 출강하며 후배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서울 성수고등학교에 근무하고 있다. ⓒ 세이프타임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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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노비아 2020-09-13 23:03:58
양성평등
직장상사의 갑질만큼 불쾌하고 기분나쁜건 없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