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으로 세상읽기] '황금빛 에로티시즘' 전통미술과 결별하다
[그림으로 세상읽기] '황금빛 에로티시즘' 전통미술과 결별하다
  • 조경희 미술팀 전문위원
  • 승인 2020.09.27 1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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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 미술을 모더니즘으로 이끈 클림트의 '키스'
▲ 클림트의 키스(1907)·캔버스에 유채·180×180㎝ ⓒ 오스트리아 벨베데레 궁전 미술관
▲ 클림트의 키스(1907)·캔버스에 유채·180×180㎝ ⓒ 오스트리아 벨베데레 궁전 미술관

"에밀리를 불러줘"

클림트가 이 세상에 남긴 마지막 말이다. 남자의 두 손이 소중하게 감싸고 있는 여인이 에밀리일까. 황금빛 천에 둘러싸인 두 사람을 따로 구별하는 게 별 의미가 없어 보인다. 애초에 영혼마저 하나였던 것처럼 그저 하나의 덩어리로 인식하는 것이 적당할 듯하다.

눈부시게 화려한 문양의 황금빛 포장 밖으로 내민 손과 발, 그리고 얼굴만이 육감적인 현실을 각성하게 할 뿐 분위기는 사뭇 몽환적이다.

시공간을 초월한 이곳엔 오직 두 사람뿐. 화려한 꽃밭은 세상으로부터 스스로 격리된 둘만의 달콤한 '유배지'일까. 세간의 시선에 밀려서 아슬아슬한 절벽의 끄트머리까지 왔지만 거부할 수 없는 사랑의 황홀함이 남녀의 이성을 제어하지는 못한 것 같다.

황금빛과 에로티시즘의 만남으로 세기말 특유의 초현실적인 분위기가 녹아있는 이 그림은 고전을 답습하던 기존의 오스트리아 미술을 모더니즘으로 이끈 상징주의 화가이자 빈 분리파 미술운동의 구심점이었던 거장 클림트(Gustav Klimt·1862~1918·오스트리아)의 대표작이다.

클림트가 17살의 에밀리를 처음 봤을 때 그의 나이 29살. 이미 성공한 화가였던 그의 곁에는 항상 여인들이 끊이지 않았지만, 자신의 남동생을 형부라고 부르는 어린 소녀와 눈이 마주친 순간 급하게 뛰기 시작한 그의 심장 때문에 클림트는 당황하기 시작했다. 에밀리도 그랬을까.

▲ 클림트의 키스 부분
▲ 클림트의 키스 부분

하지만 적극적으로 구애하는 남자에 비해 여자는 어쩐지 차분한 모습이다. 그녀의 손을 보면 남자의 목에 두른 손끝이 왠지 오므려져 있고, 나머지 왼손은 자신을 감싸는 상대의 손을 부드럽게 제지하는 듯하다. 클림트에 대한 에밀리의 사랑의 기술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어쩌면 에밀리의 이런 태도가 클림트를 그녀에게서 영원히 벗어나지 못하게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평생 독신으로 살았지만 그의 사망 직후 14명의 여인이 친자 확인 소송을 냈을 만큼 수많은 여인들과의 스캔들로 이색적인 삶을 살다간 화가, 클림트.

그 화가의 영원한 안식처이자 평생의 소울메이트, 에밀리 플뢰게. 두 사람은 서로를 원했지만 결혼은 하지 않았다.

그것이 누가 누구를 위한 배려였는지 정확히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흥미롭게도 클림트는 자신의 모델이 된 여인들과 스캔들을 자주 일으키긴 했으나 언제나 그렇듯 그는 에밀리에게로 돌아갔다. 저녁이 되면 놀던 것을 버려두고 집으로 향하는 아이처럼.

▲ 구스타프 클림트(왼쪽)와 아티제 호수에서 에밀리와 함께한 클림트. 
▲ 구스타프 클림트(왼쪽)와 아티제 호수에서 에밀리와 함께한 클림트. 

가난한 금세공업자의 7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난 클림트는 미술적 재능뿐만 아니라 경영인의 마인드까지 겸비한 인재였다. 살림이 넉넉지 않아 외삼촌의 도움으로 장식공예미술학교에서 공부하던 중 국립극장의 벽면을 장식할 프레스코화 제작에 합류하면서 세간에 이름을 알렸다.

이 일로 제법 돈을 만져본 그는 재빠르게도 17살의 나이에 동료들과 함께 벽화를 그리는 '예술컴퍼니'를 창업한다. 예상보다 빨리 사업은 성공가도에 올라섰고, 급기야 새파랗게 젊은 20대 초반에 당당히 주류 미술계에 클림트라는 이름을 각인시키며 존재감 있는 화가로 우뚝 선다.

성공의 맛을 본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성공했을 때의 틀을 계속 유지하려는 매너리즘에 빠지기 쉽다. 소위 '뽕을 뽑으려는 것'이다.

하지만 클림트는 새로운 도전을 위해 과감하게 당시 주류 미술계와 결별을 선언한다. 유럽의 다른 지역에선 파리를 중심으로 인상주의를 비롯해 표현주의와 상징주의 등 다양한 모더니즘 미술이 세기말의 시류를 타고 새로운 실험을 거듭하며 발전하고 있었고, 그것을 목도한 클림트는 오스트리아 미술을 한 단계 끌어올리는 실험적 작품 제작에 돌입했다.

"시대에는 예술을, 예술에는 자유를"

1897년 분리파(제체시온)라는 이름으로 뜻을 같이하는 동료들과 함께 새로운 미술의 역사를 열었다. '분리파'는 말 그대로 전통적인 미술과의 완벽한 분리를 원했다.

그는 장식적이고 기하학적인 문양을 과감하게 그림에 도입하고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에서 얻은 영감을 바탕으로 성적인 욕망과 여인의 관능미를 작품에 녹여내며 기존에 볼 수 없었던 독특하고 새로운 조형 세계를 펼쳐놓았다.

분리파 이후에도 그의 도전은 계속 됐다. 그의 그림에 등장한 황금빛의 화려한 문양과 팜므파탈의 이미지를 풍기는 여인들은 사람들을 당혹스럽게 만들었고, 동시에 예술적 감동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오스트리아 밖으로는 단 한 발짝도 나올 수 없는 클림트의 대표작 <키스>를 보기 위해 높은 탑에 갇힌 공주를 구하러 가듯 많은 관광객이 오스트리아 벨베데레 궁전으로 향한다. <모나리자>가 프랑스의 루브르 박물관을 먹여 살리고 있다면, 오스트리아의 벨베데레에는 클림트의 <키스>가 있다.

■ 조경희 미술팀 전문위원 = 충북대학교 사범대학에서 미술교육학을 전공한 뒤 동 대학원에서 미술교육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충북 단양군에서 교편을 잡은 뒤 미술교사로 재직하는 동안 충북대학교 미술학과에 출강하며 후배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서울 성수고등학교에 근무하고 있다. ⓒ 세이프타임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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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노비아 2020-09-27 15:52:43
요즘 젊은이들사이에뜨고있는그림
자유로운 영혼의 화가였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