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르난도 보테로의 '발레리나'

▲ 페르난도 보테로의 '발레리나', 2001, 캔버스에 유채
▲ 페르난도 보테로의 '발레리나', 2001, 캔버스에 유채

"뚱뚱한 여자를 좋아하시나요?"

페르난도 보테로(Fernando Botero Angulo, 1932~현재ㆍ콜롬비아)가 가장 많이 듣는 질문이다. 날카로운 눈빛을 가진 그의 얼굴에 답은 이미 써져 있다.

"노(No)."

이 그림의 제목은 <발레리나>. 그녀가 발레리나이기는 한 걸까? 풍만한 몸매와는 어울리지 않게 앙증맞은 작은 발, 분홍 토슈즈. 그녀는 용케도 발끝으로 서 있다. '좋아서?'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녀의 표정엔 아무 의욕도 없어 보이지만, 몸은 익숙한 듯 시크하게 고난도 발레 동작을 해내고 있다. 그 어렵다는 '데벨로페' 동작이다. 단지 짧고 굵을 뿐 완벽한 자세다.

여기서 '빌렌도르프의 비너스(Venus of Willendorf)'를 슬쩍 떠올리면 발레리나에게 실례일까. 머리가 크고 다리는 짧지만 다산의 상징인 젖가슴과 골반 부위만 튼실하면 당대의 이상형이 될 수 있던 구석기 시대의 여인상 말이다.

머리에 꽂은 장미 한 송이는 유혹적이라기보다 산골 소녀가 한껏 멋 낸 듯 순진해 보인다. 이런 그녀의 모습에서 우리가 주목할 것이 있다. 그녀는 뚱뚱하지만,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것. 마른 몸에 대한 선호도가 높아지면서 다이어트 강박에 시달리고 있는 요즘, 현대 여성에게서 이런 자신감을 찾아볼 수나 있을까.

남미의 콜롬비아 태생인 보테로가 제대로 된 미술교육을 받은 것은 19세가 돼서다. 어려서부터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하긴 했으나, 미술학교와 상관없는 투우사 양성학교를 다녔다. 4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삼촌의 돌봄을 받고 자라면서 생계에 더 치중한 탓으로 보인다.

그러다가 16세에 메델린 연구소에서 개최한 그룹전에 두 점의 수채화를 출품하면서 운명처럼 미술의 길로 접어들었다.

이후 스페인과 이탈리아에 머물면서 르네상스 화가들이 창조해낸 인체의 아름다움과 바로크 미술의 찬란한 색채에 매료된다. 그리고 이들 거장의 작품을 모사하며 연구하는 과정에서 깨달음을 얻었다.

위대한 예술은 기존의 것을 답습하는 것으론 절대 이룰 수 없으며, 새로운 조형미를 구축하는 것이 관건이라는 것을 말이다.

이런 직감은 보테로를 오늘날 살아있는 거장으로 만들어 주었다. 인체를 비롯한 모든 대상의 볼륨을 극대화 시키며 화면을 가득 채우는 사랑스러운 뚱뚱함이 그가 창조해낸 조형미다.

마치 에어 펌프로 잔뜩 펌프질을 한 튜브처럼 뺑뺑하게 부풀려진 그의 피조물들, 그리고 순수하고 활기찬 색감, 이것은 단순한 자연의 재현이 아닌 보테로의 관념에서 나온 조형의지의 구현이다.

▲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모나리자'를 패러디한 보테로의 '모나리자'
▲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모나리자'를 패러디한 보테로의 '모나리자'

그의 그림이 본격적으로 화단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 중반 독일에서다. 독일 비평가들은 그의 그림을 '사회를 바라보는 심술궂은 반어법'이라고 해석했다.

귀족과 정치인, 신부와 수녀를 비롯해 가진 자들을 하나 같이 뚱뚱하고 멍한 표정으로 그렸기 때문이다. 권위와 외적인 형식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들을 실랄하게 풍자한 것이 아니냐는 호평이 쏟아졌고, 이내 그는 유명세를 내는 작가의 반열에 올랐다.

물감을 뿌리거나 떨어뜨리고 뭉개는 등 형태를 알아보기 어렵게 그리는 추상표현주의 작품 앞에서 당황하던 감상자들은 보테로의 작품 앞에선 편안해진다.

양식적 특성, 상징과 의미, 미술사의 맥락을 알아야만 이해할 수 있는 어려운 미술이 아니라, 이상적인 아름다움을 걷어낸 친근하고 재미난 그림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렇게 무장해제 된 채 보테로 특유의 유머 감각과 어우러진 남미의 정서를 거부감 없이 받아들인다. 생소했던 라틴 아메리카의 미술이 보테로를 통해 전 세계에 알려지게 된 것이다.

튼실한 허벅지, 보이지 않는 턱선, 겹쳐진 뱃살에도 불구하고 타이트한 발레 의상을 입고 아무렇지 않다는 듯 무표정 한 그녀를 보며 사람들은 저마다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

언제나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며 배에 힘을 주고 근육을 경직시킨 채 아름답고 교양 있어 보이도록 애쓰며 살고 있는 우리 자신의 위선을 안쓰럽게 돌아보지 않았을까.

"그렇게 한가하면 살이나 빼십시오."

어느 당 최고위원은 자신도 여자임에도 불구하고 영부인을 향해 이 황당한 발언을 해서 화제가 됐다. 청와대 경내의 감을 따서 영부인이 손수 곶감을 만들어 국빈과 출입기자들을 대접한 것이 그녀의 비위를 거스른 모양이다.

그러나 이 말은 사람들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키지 못하고 불편함을 불러왔다. SNS엔 항의 댓글이 빗발쳤다. 저 짧은 문장은 왜 그토록 많은 사람들의 공분을 산 것일까.

그것은 아마도 가식적인 가면을 벗고 보테로의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들처럼 솔직한 모습, 날것 그대로 살아가고 싶은 욕구를 마음 깊은 곳에 가둬놓고 살다가 느닷없이 공격을 받은 황당함에서 출발했으리라.

마네킹처럼 되고 싶은 현대인이여, 의미 없는 자학에서 벗어나기를 ···.

■ 조경희 미술팀 전문위원 = 충북대학교 사범대학에서 미술교육학을 전공한 뒤 동 대학원에서 미술교육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충북 단양군에서 교편을 잡은 뒤 미술교사로 재직하는 동안 충북대학교 미술학과에 출강하며 후배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현재 서울 성수고등학교에 근무하고 있다. ⓒ 세이프타임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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