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으로 세상읽기] 타히티는 고갱의 예술적 신천지였나?
[그림으로 세상읽기] 타히티는 고갱의 예술적 신천지였나?
  • 조경희 전문위원
  • 승인 2021.11.28 2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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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고갱의 '시장(Ta Matete)'
▲ 폴 고갱(Paul Gauguin)의 작품 '시장(Ta Matete: We shall not go to market today)' (1892·캔버스에 유채· 73×92㎝) ⓒ Kuntmuseum Basel, 스위스
▲ 폴 고갱(Paul Gauguin)의 작품 '시장(Ta Matete: We shall not go to market today)' (1892·캔버스에 유채· 73×92㎝) ⓒ Kuntmuseum Basel, 스위스

"당장 여길 떠나버리겠어!"

자신과의 말싸움 끝에 고흐가 귀까지 자르며 난동을 부리자 고갱은 그나마 애써 유지해오던 인내심이 바닥을 치는 걸 느꼈다. 사나운 짐승처럼 울부짖는 고흐를 더 이상 봐주다간 자신도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오만정이 다 떨어졌다. 지긋지긋한 이 노란집(아를에 있는 고흐의 화실)을 탈출할 절호의 기회가 온 것이다.

고갱은 허겁지겁 짐을 싸서 파리로 향했다. 고흐의 동생 테오가 파리에서 잘나가는 아트디렉터가 아니었다면 고갱은 절대로 '아를에 있는 형에게 가달라'는 테오의 부탁을 거절했을 것이다. 고흐와 함께 지내면서 화가공동체를 이룬다는 게 자신에게 무슨 도움이 될까 싶었다. 고갱의 눈에 고흐는 그저 열정만 가득한 풋내기 화가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파리에 도착한 고갱은 생각이 많아졌다. 당시 파리의 미술시장은 인상주의 미술의 등장으로 전통적 아카데미즘 미술이 주류에서 밀려나고 있었고, 미술계는 모더니즘의 영향 아래 추상적 기운이 꿈틀대는 격동의 시기였다.

▲ 고갱의 자화상('황색 그리스도가 있는 자화상'·1889)
▲ 고갱의 자화상('황색 그리스도가 있는 자화상'·1889)

인상주의가 등장한 19세기 후반 이후로 미술계를 비롯한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단연코 '창조성(creativity)'이었다. 그렇기에 화가들은 자연을 화면에 그대로 재현하는 일은 이제 '카메라'에게 넘겨주고, 자신만의 새로운 표현 방식을 찾는 일을 급선무로 여겼다.

마흔이 넘은 나이에 화가의 길로 들어선 고갱은 이전에 주식중개인으로 먹고살면서 경제적 시류를 읽는 안목을 터득한 덕분인지 눈치가 빨랐다. 이미 유행하고 있는 인상파 화가들의 꼬리나 붙잡고 있다간 영원히 무명화가의 길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을 본능적으로 알았다.

마음이 다급해진 고갱은 일단 짐부터 싸서 무작정 파리를 떠났다. 프랑스 북부 브르타뉴의 퐁타방에 머무는 동안 그는 강렬한 원색의 색채와 브르타뉴 특유의 문화를 결합하는 실험적인 연구에 몰두한 결과 미술계에서 꽤 인지도를 높이게 된다.

특히 구약 성경 창세기의 천사와 야곱이 씨름하는 장면을 담은 <설교 후의 환상>은 그 시절 고갱의 대표작으로 과감하게 빨간색을 배경으로 칠해서 현실과 환상의 느낌 모두를 담아냈다며 화가들 사이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이에 자신감을 갖게 된 고갱은 점점 더 자신만의 독자적인 표현의 세계를 갈망하게 되고, 마침내 자신의 예술세계를 완성할 신천지를 찾아 여행을 떠난다.

▲ 고갱이 브르타뉴에서 그린 '설교 후의 환상' 1888
▲ 고갱이 브르타뉴에서 그린 '설교 후의 환상' 1888 

그렇게 고갱은 남태평양의 외딴섬 타히티로 향하는 배에 올랐다. 문명에서 완전히 분리된 곳이어야 화가로서 새로운 출발을 할 수 있을 거라는 나름의 계산이었다. 유럽인들이 태평양 탐험에 나선 후 처음으로 폴리네시아인들을 발견했을 때 그들이 여전히 석기 시대와 같은 삶의 방식으로 살고 있었기 때문에 고갱은 타히티야말로 자신의 창조적 영감을 솟구치게 할 최적의 장소라고 믿었다.

그러나 타히티 항구에 도착한 고갱은 눈앞의 현실에 망연자실 했다. 문명으로부터 스스로를 고립시키기 위해 원시의 순수성을 찾아 두 달 넘도록 고생하며 태평양을 건너왔건만, 이미 이곳은 유럽의 때가 잔뜩 묻어 있었다. 프랑스의 식민지가 된 타히티는 섬이 갖고 있던 독자적인 문화를 스스로 지킬 수 없는 처지였다.

처자식 다 버리고 오로지 예술적 성취를 이루기 위해 찾아온 신천지였으나 서구 문명의 해악에 의해 파괴된 타히티 문화와 원주민의 모습에 고갱은 안타까움과 실망감을 감출 수 없었다.

이 그림을 그린 고갱(Paul Gauguin, 1848~1903, 프랑스)은 고흐, 세잔과 함께 후기 인상주의 미술 화가로 분류되며, 상징주의 및 야수주의 미술의 등장에 강한 동기를 제공하여 근대 미술의 흐름에 변화의 바람을 일으킨 인물이다.

▲ 이집트 벽화의 부분
▲ 이집트 벽화의 부분

타히티 섬에 들어가기 전에 고갱은 이집트 미술에 강한 인상을 받아 이집트 관련 자료를 많이 수집하기도 했는데, 이 그림에서 의자에 나란히 앉아있는 여인들의 모습은 이집트 벽화에서 영감을 받은 듯하다.

여인들은 한껏 치장을 했지만 어쩐지 남의 옷을 입고 있는 듯 어색한 느낌을 주고 있다. 타히티의 여인들이 평소 입는 의상이 아닌 유럽식 복장이다. 그녀들의 옷에는 남태평양의 화려한 꽃들처럼 여러 색상이 사용되긴 했지만, 적도에 근접한 섬의 기후와는 맞지 않은 긴 팔의 드레스에 목을 꽉 죄는 듯한 네크라인이 답답해 보인다. 유럽의 여인들을 흉내 낸 느낌이 강하다.

▲ 고갱의 '시장'의 부분
▲ 고갱의 '시장' 부분(앉아 있는 여인들의 모습)

이 그림의 제목은 <시장(Ta Matete)>인데 특이하게도 'We shall not go to market today.'라는 부제가 덧붙여졌다. 여기서 'market'은 식재료와 생필품을 파는 슈퍼마켓이나 재래시장이 아니다. 사람이 몸을 파는 시장, 즉 성매매가 이뤄지는 곳을 의미한다. 외부로부터 선진 문물이 들어올 때 이런 저급한 문화부터 빠르게 유입되는 건 씁쓸하지만 흔한 일이다.

그림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여인들의 손에 작은 종이가 쥐어져 있다. '건강진단서'다. 'We shall not go to market today.'를 해석하면 '오늘은 (성병 감염 여부를 검사하는 날이라서) 일을 하지 않을 거다.'가 된다. 오늘은 일하지 않아도 돼서 좋다는 건지, 일할 수 없게 된 이유를 단순히 설명하고 있는 것인지 정확한 의미는 알 수 없지만, 저 여인들이 줄지어 앉아 있는 이유를 알게 된 사람들이라면 대부분 착잡한 심정이 들었으리라.

▲ 고갱의 '시장' 부분(작은 종이를 든 여인들)
▲ 고갱의 '시장' 부분(작은 종이를 든 여인들)

여인들이 유럽식 드레스를 입고 있는 이유가 이제 뻔해졌다. 성을 매수하는 사람들이 프랑스의 식민지 지배자들과 유럽의 선원들이기 때문이었다. 지리상 발견의 시대가 있었기에 오늘날 세계 여러 나라들이 무역과 교류를 통해 상생을 하게 됐지만, 안타깝게도 당시엔 식민지 지배자들에 의해 원주민의 삶이 무참히 파괴되는 결과를 낳았다.

특히 유럽의 백인 남성들이 품고 있던 이국적 식민지에 대한 그릇된 환상인 '오리엔탈리즘'은 식민지의 여성들을 성적인 대상으로 전락시키고 자신들의 욕망을 채우기 위한 도구로 만들었다.

▲ 고갱의 '시장' 부분(뒤쪽에 보이는 남자들은 여전히 어업과 농사 등 전통적인 방식으로 일하는 모습, 앞쪽의 여인들과 대조를 이루고 있음)
▲ 고갱의 '시장' 부분(뒤쪽에 보이는 남자들은 여전히 어업과 농사 등 전통적인 방식으로 일하는 모습, 앞쪽의 여인들과 대조를 이루고 있음)

물론 고갱은 타히티 섬의 문화를 보호하기 위해 프랑스 정부를 상대로 싸울 만큼 이곳을 사랑했다. 하지만 그 역시 유럽 출신의 백인 남자였기에 분명 한계가 있었다. 고갱이 미술사에서 피카소보다 한층 더 '나쁜 남자'로 불리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데, 고갱 스스로는 그게 특별히' 나쁜 짓'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은 듯하다.

그는 백인의 삶을 선망하는 원주민 여인들의 순수한 마음을 이용한 후 별다른 가책도 없이 '새로운 순수'를 찾아 떠나버렸다. 그 중에는 열네 살밖에 안 된 소녀도 있었다. 모델이 된 어린 소녀와 결혼까지 하며 섬에 정착하는가 싶더니, 언제 돌아온다는 기약 없이 파리로 가서 다시는 그녀에게로 돌아가지 않았다.

벌이라도 받은 것일까? 타히티에서 2년여 동안 제작한 그림들을 가지고 파리로 돌아온 고갱은 뼈아픈 좌절을 맛봐야 했다. 금의환향을 꿈꿨지만 파리의 미술시장은 반응이 싸늘했다. 이국적인 원시의 풍경과 파격적인 색채를 사용한 그의 그림을 보고 많은 화가들이 그를 존경해마지 않았지만, 생활을 위협하는 불규칙한 수입과 미술시장에서 외면당하는 현실의 벽 앞에서 고갱은 좌절을 지나 분노를 느꼈다.

▲ 고갱의 유작 '우리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 고갱의 유작 '우리는 어디서 왔으며 누구이고 어디로 가는가' 1897

그러던 어느 날 자신의 마지막 순간을 예견이라도 한 듯 파리에서의 모든 인연을 정리한 고갱은 영원히 타히티로 떠나버린다. 인적이 매우 드문 깊은 원시림을 찾아 들어간 그는 스스로 선택한 유배지에서 오로지 그림만 그렸다. 그러나 위대한 예술적 성취를 이루고 싶은 그의 간절한 염원에도 불구하고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비극적인 생의 결말이었다.

마음에 빚을 진 사람들에 대한 회한의 감정뿐만 아니라 매독과 우울증으로 처절한 나날을 보내던 고갱은 타히티의 작은 섬에서 그의 지난했던 생을 마감한다.

그가 가졌던 예술적 주제의식과 색채 및 구상기법을 총동원한 그림 <우리는 어디서 왔으며 누구이고 어디로 가는가>는 그의 마지막 유작이자 유언이 됐다.

그리고 억울하겠지만 고흐가 그랬듯이 고갱도 그가 죽은 후에야 미술사에 이름을 남기는 유명화가가 된다.

▲ 고갱의 '시장' 부분(오른쪽 맨 앞쪽에 원주민 의상을 입은 여인)
▲ 고갱의 '시장' 부분(오른쪽 맨 앞쪽에 원주민 의상을 입은 여인)

그런데 오른쪽 맨 앞쪽에 타히티의 전통의상인 붉은 색 치마를 입고 있는 여인의 표정이 예사롭지 않다. 왠지 못마땅한 표정이다. 그녀는 나란히 앉아있는 여인들을 바라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혹시 이런 생각을 한 건 아닐까?

"I shall not go to market(나는 너희들처럼 되지 않겠어)."

■ 조경희 미술팀 전문위원 = 충북대학교 사범대학에서 미술교육학을 전공한 뒤 동 대학원에서 미술교육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충북 단양군에서 교편을 잡은 뒤 미술교사로 재직하면서 충북대학교 미술학과에 출강하며 후배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현재 서울 성수고등학교에 근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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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희 2021-11-30 16:10:32
미술이야기를 이렇게 재미나게 설명해주시는 훌륭한분이시네요 ㅎㅎ

신성자 2021-11-29 14:42:24
좋은글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