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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으로 세상읽기] <12> 크리스마스, 아베 마리아■ 프라 안젤리코 <수태고지>
조경희 미술팀 전문위원 | 승인 2016.12.24 22:24
프라 안젤리코, <수태고지(The Annunciation)>, 1442~1443, fresco, 230×297cm, 피렌체의 산 마르코 미술관.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에게 찾아와 예수 그리스도를 잉태하게 됨을 알리는 '수태고지(受胎告知)'는 기독교적 사건이다. 당시 유대 율법은 처녀가 임신하면 돌로 쳐 죽였다. 약혼한 여인에게 이 말은 사형선고나 다름없었다. 

예수가 십자가형을 당하기 전 겟세마네에서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며 인간적인 심경을 보여주고 있듯이, 마리아도 이 엄청난 사명을 다른 이에게 돌려버리고 싶었을지 모른다. 죽게 되거나 평생 주홍글씨를 가슴에 달고 살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녀는 두 손을 가슴에 모으고 있다. 자신의 운명을 기꺼이 받아들이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평범한 시골 소녀에서 인류 구원자의 어머니가 되는 이 사건은 예수 탄생, 즉 크리스마스로부터 9개월 전인 3월 25일에 일어난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그림을 그리는 화가 프라 안젤리코(Fra Angelicoㆍ본명 귀도 디 피에트로ㆍGuido di Pietroㆍ1387~1455ㆍ피렌체)는 수도사였다. 프라(Fra)는 수도사 이름 앞에 붙이는 호칭으로 '형제'라는 뜻이고, 안젤리코는 '천사 같은'이라는 뜻이다.

동방의 작은 나라 조선의 임금 세종이 한글 창제를 위해 박차를 가하고 있을 즈음, 서양미술사의 획기적인 문예부흥기 르네상스의 한 토막을 프라 안젤리코가 담당하고 있었다. 입체감 있는 공간 표현, 인체의 자연스러운 볼륨감 표현 등 당대의 회화 기법을 두루 섭렵한 그는 수도사로서의 경건함, 신실함에 신학적 지식을 담아 피렌체 산 마르코 수도원을 아름다운 프레스코화로 장식했다.

프레스코 기법은 벽에 칠한 두터운 회반죽이 건조되기 전에 그림을 그려 물감이 벽에 스며들어 완성된다. 몇 세기가 지나도 색채가 표면에서 벗겨지지 않고 보존이 잘 되는 장점이 있지만 회반죽의 건조가 빠르기 때문에 대가들이나 감당할 수 있는 벽화 제작기법이다.

그림은 은은한 파스텔 톤의 색채 덕분에 따스하고, 부드러우며 경건함을 느끼게 한다. 그 색채처럼 온화한 표정의 천사가 두 팔을 포개며 마리아에게 극존경을 표하고 있다. 마리아도 겸손한 태도로 천사가 전하는 신의 뜻을 받아들이고 있다. 신성한 대화가 들리는가. 심리적인 교감을 이룬 두 인물의 표정을 통해 작가의 따뜻한 마음과 깊은 신앙심을 느낄 수 있다.

종교화에서는 언제나 그렇듯 중요 인물에는 후광이 있다. 당연히 여기의 마리아와 천사에게도 후광이 있다. 금빛이다. 금색으로 보이도록 하는 무언가가 아니라 진짜 금이다. 금화를 곱게 갈아 만든 가루를 접착성 재료와 섞어 칠했다. 이 시대의 그림은 얼마나 잘 그렸는가도 중요하지만, 표면 자체에 칠해진 물질의 가치가 그림의 가치에 영향을 주는 경우가 많다.

금도 금이지만, 마리아의 겉옷에 쓰인 파란색은 당시 금보다 귀하게 여겨지던 라피스 라줄리(lapis lazuliㆍ청금석)를 갈아 만들었다. 파란색은 천상의 색으로 동정녀인 마리아의 순수함을 상징하며 이는 아예 하나의 전통으로 자리 잡아 아이콘화(iconography) 됐다. 파란색 겉옷을 입지 않은 마리아를 상상할 수조차 없는 것이다.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고요하고 명상적인 분위기의 이 그림은 신비로운 그날의 사건을 '보는성경'의 차원으로 수도사의 묵상을 위해 그려졌다. 보다 정확한 의도는 신앙생활에서 '순종'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는 말은 어쩌면 성경의 핵심일지도 모른다. 오로지 찬양받기 위해 피조물을 만드셨다고 할 만큼 조물주는 피조물의 절대적 복종을 원하기 때문이다.

순수함은 순종을 이끌어 내는 원동력이다. 성경에 기록된 바 없지만, 외경에 의하면 수태고지는 마리아의 나이 14세에 일어난 일이라고 한다. 우리 나이로 중2에 해당한다. 철모르는 사춘기 소녀가 중세 이후 서구문명의 정신적 기반이 된 기독교의 중심인물이 된 것은 아마도 그녀가 가진 ‘순수함’ 때문이 아닐까.

순수함은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위해 앞만 보고 가는 10대의 직진성을 담보로 해 행동으로 옮겨진다. 이리저리 계산하지 않는 나이, 10대가 아니면 어렵다. 16세에 천사 미카엘의 계시를 받아 오를레앙 전투에서 승리하며 백년전쟁을 종식시킨 프랑스의 영웅 잔다르크, 대한독립을 위해 만세운동을 이끈 16세의 유관순 열사, 4ㆍ19 학생의거 주역들이 10대였다. 역사의 변화를 이끄는 힘은 진리를 향한 순수함이라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마리아는 예수 사후 24년 동안 살다가 그 몸 그대로 하늘로 올라갔다고 한다. 성모승천 시 마리아의 나이는 몇 살이었을까. 예수탄생이 수태고지가 있었던 그해 겨울, 33년 후 예수의 십자가형 집행, 모두 합하면 14+33+24=71. 성모승천은 마리아가 71세 때라고 보면 무리가 없을 듯.

아이의 생일에 엄마는 생일상을 차리느라 분주하다. 그날은 엄마가 아이를 낳느라 빈사 직전까지 오가며 엄청난 산고를 겪은 날이건만, 정작 주인공은 엄마가 아닌 아이. 자식의 성장 뒤에는 그의 건강과 안녕을 위해 헌신하는 어머니가 있다. 그런 이유로 이번 크리스마스에는 생일을 맞은 주인공 예수가 아닌 그 어머니를 생각해 본다.

개신교는 마리아의 존재를 가톨릭만큼 중요하게 여기지 않지만, 오늘 만큼은 그 추운 마구간에서 출산하느라 고생했노라고 위로의 말을 전하고 싶다.

아베(Aveㆍ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

조경희 미술팀 전문위원  zzozzokh@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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