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으로 세상읽기] 당신은 '인종차별'에 떳떳한가요
[그림으로 세상읽기] 당신은 '인종차별'에 떳떳한가요
  • 조경희 미술팀 전문위원
  • 승인 2020.11.23 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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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리 루소의 '잠자는 집시'
▲ 앙리 루소의 작품 '잠자는 집시(The Sleeping Gypsy)'(1897·캔버스에 유채·129.5×200.7㎝) ⓒ 뉴욕 현대미술관
▲ 앙리 루소의 작품 '잠자는 집시(The Sleeping Gypsy)'(1897·캔버스에 유채·129.5×200.7㎝) ⓒ 뉴욕 현대미술관

집시 여인이 잠들어 있다. 행복한 꿈을 꾸고 있는 듯 표정이 평온하다. 보름달은 환한 얼굴로 세상을 내려다보며 태고의 순수함을 찾아 두리번거리다 여기서 시선이 멈춘 것 같다.

아무렇게나 풀어진 긴 머리와 검고 건강한 피부는 그녀가 아직 문명의 때가 묻지 않은 순수한 영혼임을 느끼게 한다. 만돌린을 닮은 악기는 이 외로운 여행에 위안이자 그녀의 유일한 친구인 듯 나란히 누웠다. 고단한 하루를 보낸 몸을 작은 담요에 뉘면서 언제나 그랬듯 밤하늘을 천장 삼아 눈을 감았다.

저녁을 먹기는 했을까. 머리맡에 놓인 질그릇 물병에 담긴 물이 오늘 저녁에 그녀가 먹은 소박한 식사의 전부였는지도 모른다. 해 지기 전에 들린 마을에서 누가 이 떠돌이 집시 여인을 귀하게 대접했겠는가. 어우러져 살 수 없다면 차라리 이렇게 세상과 격리된 채 살아가는 게 그녀에게 더 속 편한 일이다. 달빛을 이불로 덮고 살더라도 그녀를 달래줄 애잔한 소리를 내는 둥글고 작은 악기 하나 곁에 있다면 말이다.

▲ 앙리 루소의 작품 '잠자는 집시(The Sleeping Gypsy)'의 부분(집시 여인의 머리 맡에 놓여진 물병과 악기)
▲ 앙리 루소의 작품 '잠자는 집시(The Sleeping Gypsy)'의 부분(집시 여인의 머리 맡에 놓여진 물병과 악기)

사방이 뚫린 이 곳 풍경은 사뭇 고요하기만 한데 난 데 없이 은빛 갈기를 가진 사자가 나타나 긴장감을 조성하고 있다. 사자의 입김이 느껴져 그녀가 눈을 뜨는 건 아닐까. 제발 그냥 냄새만 맡고 가기를 바랄 뿐 감상자는 이 상황에 개입할 수가 없다. 그래도 다행인 건 사자의 눈이 동그랗게 생겨 순해 보인다는 것. 이 상황을 전부 내려다보고 있는 둥근 보름달이 동화적인 해피엔딩으로 결말을 이끌어 갈 복선이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세상의 야사에는 보름달이 유난히 자주 등장한다. 우리의 전래동화 '해님 달님'이나 '선녀와 나무꾼'처럼 보름달이 뜬 날에는 하늘에서 동아줄이 내려오거나 두레박이 내려오는 초현실적인 일이 생겨도 그것에 대해 아무도 현실적 개연성을 따지지 않는다. 보름달은 작가들에게 일종의 면죄부이며 기적이 일어나기 직전의 시그널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애처로운 이 집시 여인이 사자로부터 무사할 거라고 안심하며 감상해도 될 듯하다.

▲ 앙리 루소의 작품 '잠자는 집시(The Sleeping Gypsy)'의 부분(집시 여인 옆에 나타난 사자)
▲ 앙리 루소의 작품 '잠자는 집시(The Sleeping Gypsy)'의 부분(집시 여인 옆에 나타난 사자)

그림을 자세히 보면 왼팔을 베게 삼아 잠든 여인에게 자면서도 다른 손에 꼭 쥐고 있는 소중한 것이 있다. 나무를 다듬어 만든 지팡이다. 이것은 정처 없이 떠도는 보헤미안에게 꼭 필요한 자기방어의 수단일 수도 있고, 어쩌면 그녀는 눈먼 장님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아무도, 아무것도 단언할 수는 없다. 다만 수수께끼 같은 이 동화적인 장면을 통해 우리는 그동안 잊고 살았던 각자의 유년 시절로 돌아가 순수에 대한 기억을 더듬으며 오랜만에 상상의 세계에 발을 담글 수 있으리라.

이 그림은 프랑스 화가 앙리 루소(Henri Rousseau·1844~1911)가 그린 '잠자는 집시(The Sleeping Gypsy)'다. 루소는 이국적인 정서를 주제로 사실과 환상을 교차시킨 독특한 특징을 갖는 작품을 주로 제작했다.

루소가 살던 당시 파리에는 인상주의 미술을 비롯해 다양한 모더니즘 미술이 형태와 색채의 해방을 위한 실험적인 작품들을 내놓으며 현대미술로 달려가던 시기였다. 르네상스 이래로 황금비례와 원근법의 발달로 아카데믹한 회화의 수준이 정점에 이르러 더 이상 예술의 발전이 진화의 방향으로 순행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던 바로 그 시기다.

설상가상으로 카메라가 상용화 되면서 화가들의 입지가 점점 좁아졌고, 새로운 예술로의 출구 모색이 19세기말 당시 화가들의 생존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리고 이런 시류는 루소에게 행운으로 작용했다.

▲ 고갱의 작품 '과일을 들고 있는 여인'(1893)(왼쪽), 피카소의 작품 '아비뇽의 처녀들'(1907)의 부분
▲ 고갱의 작품 '과일을 들고 있는 여인'(1893)(왼쪽), 피카소의 작품 '아비뇽의 처녀들'(1907)의 부분

루소는 미술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탓에 인체 묘사나 공간감 표현에 서툴러 작품 활동 초기엔 별 볼 일 없는 아마추어 화가로 취급받았다. 하지만 이후에 아카데믹한 전통미술에 지루함을 느끼던 대중의 눈에 루소의 그림은 생경한 취향으로 받아들여져 점차 화가로서 입지를 다지며 인지도를 높여나갔다. 드디어 1908년에는 피카소가 자신의 화실에서 루소를 위한 연회를 베풀 만큼 미술계에서 인정받게 된다. 지금의 그는 현대의 원시적 예술의 아버지라 불릴 만큼 자신만의 전형적인 스타일을 만든 화가로 평가받는다.

19세기말 화가들을 비롯한 유럽인들은 자신들이 이뤄낸 산업혁명 이후의 근대적인 유럽의 모습을 굉장히 자랑스러워했다. 심지어 문명화가 덜 된 곳을 이상향으로 그리며 원시성을 찾아 여행을 떠나는 것을 버킷리스트로 꼽기도 했다.

파리에 이주한 피카소도 한동안 예술적 영감을 얻기 위해 원시성을 찾아 아프리카로 스케치여행을 다녀오기도 했고, 고갱은 아예 타히티 섬으로 가서 원주민의 삶속으로 들어가 예술적 순수를 화폭에 담으려 했다.

순수에 대한 동경과 막연한 오리엔탈리즘이 화가들로 하여금 이방인의 땅을 그리게 만들었고 상상의 세계로 잡아끌었다. 그러나 씁쓸하게도 여기에는 '백인우월성'이라는 개념이 스펀지가 물을 흡수하듯 조용히 그러나 흥건히 배어있었다.

화가들은 자신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제대로 인식하지 못 한 채 그저 숨 막히는 도시 문명을 벗어나 자연의 원형을 그대로 간직한 순수의 대상을 찾아 그림을 그린 것뿐이었다.

하지만 이는 화가 자신도 깨닫지 못한 사이 백인 문명의 우월성을 드러내는 수단이 됐고, 그 파급력은 은근히 이를 지속적으로 유지하는데 사용됐다.

▲ 장 레옹 제롬의 작품 '노예시장'(1867)의 부분(여자 노예를 사러 온 상인이 치아 상태를 검사하고 있는 모습)(왼쪽), 들라크루아의 작품 '사르다나팔루스의 죽음'(1827)의 부분(아시리아 왕 사르다나팔루스가 적에게 함락되기 직전 부하를 시켜 자신의 애첩과 애마를 죽이고 진귀한 보물들을 한데 모아 불사르고 자신도 불타 죽었다는 비극적 장면)
▲ 장 레옹 제롬의 작품 '노예시장'(1867)의 부분(여자 노예를 사러 온 상인이 치아 상태를 검사하고 있는 모습)(왼쪽), 들라크루아의 작품 '사르다나팔루스의 죽음'(1827)의 부분(아시리아 왕 사르다나팔루스가 적에게 함락되기 직전 부하를 시켜 자신의 애첩과 애마를 죽이고 진귀한 보물들을 한데 모아 불사르고 자신도 불타 죽었다는 비극적 장면)

1889년에 개최된 파리 세계만국박람회에는 프랑스혁명 100주년을 기념해 구스타브 에펠(Gustave Eiffel)의 설계로 파리 시내에 에펠탑이 세워졌다. 그리고 에펠탑 근처 박람회장 마당의 한 쪽에는 전시가 시작되자마자 문전성시를 이룬 이른바 '인간동물원'이 개장했다. 1492년 컬럼버스는 자신이 신대륙을 발견한 것을 증명하기 위해 아메리카 인디언 6명을 잡아 우리에 가두고 이사벨라 여왕에게 보이기 위해 전시한다. 그 이후로 이런 '미개인 전시'가 명맥을 이어오다 여기까지 이른 것이다.

유럽의 백인들은 하얀 피부를 가진 자신들을 '진화 피라미드'의 꼭대기에 올려놓고 식민지 침략을 서양 문명의 진보를 확산시키는 일이라고 착각하는 오류를 범한다.

백인들의 비뚤어진 욕망은 찰스 다윈(1809~1882·영국)의 '진화론'을 명분으로 다른 문명의 사람들을 미개인으로 취급했고, 더 나아가 아예 진화가 덜된 유인원쯤으로 여겼다. 그들에게 유인원은 인간과 전혀 다른 종으로 침팬지와 다름없는 짐승 그 자체였다.

1900년에 열린 파리 세계만국박람회에는 우리나라도 '한국관'을 열어 참가했다. 국제사회에 대한제국의 존재를 알려 하나의 독립된 나라로 인정받고자 하는 고종황제의 발버둥이었다. 구한말 부산역에 도착한 백인들은 그들이 들여온 증기기관차를 보고 놀라서 겁을 집어먹는 조선인의 행동을 보면서 속으로 비웃고 멸시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일찌감치 서양 문명의 세례를 받은 일본과 서양 열강들은 진화가 덜된 조선인을 문명화시킨다는 명분을 내세워 우리의 것을 빼앗고 짓밟으면서도 당당했던 것이다.

▲ ​파리 세계만국박람회에 개장한 '인간동물원' 전시 모습을 찍은 사진(왼쪽, 가운데), 1958년 벨기에의 '인간동물원'.
▲ ​파리 세계만국박람회에 개장한 '인간동물원' 전시 모습을 찍은 사진(왼쪽, 가운데), 1958년 벨기에의 '인간동물원'.

유럽에서 시작된 비인간적인 인간동물원은 유럽에만 국한되지 않고 이후에 미국, 일본, 호주에서도 전시가 열리면서 점차 일상화된 전시로 자리 잡는다. 서양의 문물을 여과 없이 받아들인 일본도 1907년 도쿄권업박람회에서 조선인 남녀를 비롯해 여러 나라의 인종을 전시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세계 여러 곳에 이런 인간동물원이 열려서 1958년까지 존속했다는 것이다.

2011년 파리에서는 이런 야만적인 전시를 주도한 백인들의 만행을 폭로하는 전시회가 열렸다. 프랑스 국가대표 축구선수 출신으로 인종차별반대운동가로 활약하고 있는 릴리앙 튀랑이 기획한 '인간동물원:야만인의 발명(Human zoos: The Invention of the Savage)'이라는 전시다. 이는 과거를 반성함과 동시에 현재 지구상에 잔존하는 인종차별에 대한 반성을 촉구하는 자리였다.

우리의 사정은 좀 어떤가. 백인에게 무시당한 우리는 인종차별의 문제에 있어서 떳떳한가. 유색인종이라며 흑인만도 못한 취급을 당할 때는 억울함을 느끼면서도 우리 역시 백인과 같은 시선으로 저개발국가의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지는 않는지 되돌아 볼 일이다.

그저 다 같이 지구에 살고 있는 생명체로서 피부색, 경제적 수준, 종교, 신분, 계층, 성별에 따른 구분 없이 서로를 동등하게 대한다면 그것이 바로 원시의 순수함이 지상에 구현된 이데아가 아닐까.

다시 그림을 들여다 보자. 저 검은 발로 하루 종일 얼마나 많이 걸었을까. 노곤함에 금방 잠들어버린 여인이 꿈속에서 만큼은 모두와 함께 어울려 행복하기를...

■ 조경희 미술팀 전문위원 = 충북대학교 사범대학에서 미술교육학을 전공한 뒤 동 대학원에서 미술교육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충북 단양군에서 교편을 잡은 뒤 미술교사로 재직하면서 충북대학교 미술학과에 출강하며 후배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현재 서울 성수고등학교에 근무하고 있다. 

ⓒ 세이프타임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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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노비아 2020-11-23 15:23:26
우리나라는 정치인들이 만들어 놓은 학연과지역주의가 심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