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으로 세상읽기] 낯선 이미지, 상상력에 날개를 달다
[그림으로 세상읽기] 낯선 이미지, 상상력에 날개를 달다
  • 조경희 미술팀 전문위원
  • 승인 2021.09.09 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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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 마그리트의 '집단적 발명'
▲ 르네 마그리트(Rene Francois Ghislain Magritte)의 작품 '집단적 발명(L'invention Collective)' (1934) ⓒ
▲ 르네 마그리트(Rene Francois Ghislain Magritte)의 작품 '집단적 발명(L'invention Collective)' (1934)

(세이프타임즈 = 조경희 전문위원) 이 그림을 처음 본 사람들 대부분은 아마도 망치로 머리를 한 대 맞은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불경스러울 만큼 강하게 느껴지는 생경함으로 인해 충격을 받은 탓도 있고, '나는 왜 이런 생각을 안 해봤을까' 하는 의문의 패배감이 들어서일 수도 있다.

어떤 이유에서든 이 그림 앞에 서면 누구나 곤란해지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여태껏 알고 있던 인어의 모습은 이게 아니기 때문이다.

전 세계 어린이의 꿈과 상상력에 지대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안데르센의 동화 속 인어공주는 분명 긴 머리에 아름다운 얼굴을 가진 여인으로 바닷속을 자유롭게 헤엄칠 수 있는 물고기의 꼬리가 있다.

게다가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된 디즈니사의 인어공주 캐릭터는 이미 지구인에게 전형적인 인어의 모습을 각인시키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운 바 있기에 바닷가에 누워 있는 이 괴생물체를 보고 놀라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고등어처럼 생긴 생선머리와 제법 미끈한 사람의 다리를 가진 이 해괴망측한 존재를 인어라고 해야 할까 말까 망설이는 사이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인어에 대한 명쾌한 개념정리의 욕구와 더불어 정체성에 대한 관심이 순간적으로 치솟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 디즈니사의 애니메이션 영화 '인어공주'의 한 장면(왼쪽), 안데르센의 동화를 기념하기 위해 코펜하겐 항구에 세워진 인어 동상(덴마크의 조각가 에드바르드 에릭센 작품(1913))
▲ 디즈니사의 애니메이션 영화 '인어공주'의 한 장면(왼쪽), 안데르센의 동화를 기념하기 위해 코펜하겐 항구에 세워진 인어 동상(덴마크의 조각가 에드바르드 에릭센의 작품. 1913)

"이게 뭐야? 이걸 뭐라고 해야 돼?"

인간의 외부 장기라고 불릴 만큼 이제 우리 몸의 일부가 돼 버린 스마트폰으로 '인어'를 검색하면 이 궁금증은 즉각 풀린다. 반인반어(半人半魚)라고 해서 다 인어가 아니었다.

인어의 개념에는 상반신은 사람이고 하반신은 물고기라는 디테일이 반드시 필요했던 거다. 자칫 상하가 바뀌거나 좌우가 반반씩인 경우도 인어라고 인정하는 오류를 범할 뻔 했다.

▲ 권오광 감독의 영화 '돌연변이'의 한 장면(주연 이광수(생선머리로 분장), 박보영)(왼쪽), 주성치 감독의 영화 '미인어'의 두 개의 장면
▲ 권오광 감독의 영화 '돌연변이'의 한 장면(주연 이광수(생선머리로 분장), 박보영)(왼쪽), 주성치 감독의 영화 '미인어'의 두 개의 장면(가운데, 오른쪽). 두 영화 모두 마그리트의 작품 '집단적 발명'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함.

그렇다면 바닷가에 누워 있는 저 낯선 생물체의 정체는 뭘까? 왠지 밥상에서 자주 봤던 얼굴이지 싶은데, 저렇게 생긴 머리로 사람처럼 논리적인 사고를 할 수 있을까? 스스로는 자신을 무엇이라고 생각할까? 인어? 인어의 돌연변이? 사람의 머리를 가진 인어공주는 사람의 다리를 갖고 싶어 했는데, 생선의 머리를 가진 저것은 당연히 생선의 꼬리를 갖고 싶었을까? 눈은 왜 저리 슬퍼 보이는지. 위로가 필요해 보인다.

언제부턴가 우리는 몸 전체에서 머리를 가장 중요하게 여기게 됐다. 머리를 써서 돈을 버는 것이 육체노동으로 돈을 버는 것보다 더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도 그런 맥락에서 나온 사고방식이다. 아마도 몸을 조종하는 핵심 부품인 뇌가 머리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인지 정체성을 구분할 때 종종 머리가 판단의 기준이 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바닷가에 누워있는 저것의 정체는 분명 생선?

한 번도 본 적 없지만 어딘가에 살아있을 것만 같은 존재, 인간의 집단적 세뇌의 결과물일 뿐이라는 걸 알면서도 오래전부터 사람들의 의식 속에 함께 살아와서 마치 실존하는 존재로 착각할 만큼 우리 삶 속에서 이미 존재감 있는 존재가 돼버린 존재, 인어. 그 인어가 지금 이 그림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우리에게 묻고 있다. 한마디로 이 그림을 그린 화가는 우리 인류가 왜 호모 사피엔스인지를 자각하도록 만든다. '생각 좀 하고 살라'는 것이다.

▲ 르네 마그리트의 모습
▲ 르네 마그리트의 모습을 찍은 사진(자신의 작품인 '겨울비'를 뒷배경으로 찍음)

벨기에 출신의 초현실주의 화가 마그리트(Rene Francois Ghislain Magritte, 1898~1967)가 그린 이 그림의 제목은 <집단적 발명>이다. 마그리트는 바닷가에 누워있는 이 기형적인 형상을 통해 역설적이게도 우리가 알고 있던 기존의 정상적인 모습의 인어도 사실은 그저 사람들의 상상력이 만들어낸 허구적 존재일 뿐이라는 걸 깨닫게 만든다. 이는 특정 집단에 속한 사람들이 그들만의 신념에 갇혀서 어떤 뉴스가 진짜이고 가짜인지 팩트를 따져볼 의지도 없이 믿고 싶은 대로 믿는 현상에 대한 위험성을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마그리트의 그림은 철학적 사색을 불러온다. 그는 '데페이즈망(depaysement)'의 원리를 그림에 적용하여 비논리적이며 수수께끼 같은 이미지를 만들어 고정관념에 지배당한 우리에게서 뼈아픈 반성을 이끌어낸다. 그리고 우리가 좀 더 주체적으로 세상을 바라볼 것을 요구하고 있다. 창의성(Creativity)에 대한 주문이다. 이는 오늘날 다양한 산업 분야에서 마그리트의 작품이 수없이 많이 오마주 되고 있는 가장 큰 이유이기도 하다.

▲ 마그리트의 작품 '겨울비'(1953)(왼쪽), 국내 모기업 휴대폰 광고의 한 장면(가운데), 두 명의 워쇼스키 감독의 영화'매트릭스3'의 한 장면
▲ 마그리트의 작품 '겨울비'(1953)(왼쪽), 국내 모기업 휴대폰 광고의 한 장면(가운데), 두 명의 워쇼스키 감독의 영화'매트릭스3'의 한 장면

데페이즈망의 원리는 '낯설게 하기'라고 이해하면 된다. 특정한 대상을 상식의 맥락에서 '추방'시켜서 엉뚱한 상황에 놓이게 하거나,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것들을 결합하여 새로운 이미지를 만드는 등 낯선 장면을 연출하는 것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이미지는 기묘한 분위기를 만들어 궁극적으로는 사람의 의식을 현실 너머의 새로운 상상의 세계로 인도한다. 그 초현실의 세계에 발을 딛는 순간 기존의 상식이 전복되고 새로운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안목이 생기는 것이다.

인간의 상상력은 이미 기원전부터 신(神)들의 심기를 건드리기 시작했고, 마침내 근대를 겪으며 더욱 본격적으로 창조의 영역에 도전하기 시작했다. 마그리트를 비롯한 초현실주의 화가들은 예술이라는 보호막을 쓰고 오직 신의 고유 영역이라 믿고 있던 창조의 영역을 야금야금 침범해 들어갔다.

신의 입장에서 보면 인간이 만든 예술품이라는 게 고작 자연을 모방한 저급한 낙서이거나 고물 따위일 수도 있고, 자신의 피조물들을 지능적으로 편집해서 만든 조잡스런 표절에 불과할 수도 있겠지만, 인간은 아무짝에도 못 써먹을 것 같은 예술작품이라는 것을 만들어내며 자신의 존재의 이유를 찾고자 부단히 노력한다.

▲ 마그리트의 작품 '피레네성'(1959)(왼쪽),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하울의 움직이는 성'의 한 장면(가운데), 제임스 카메론 감독의 영화 '아바타'의 한 장면
▲ 마그리트의 작품 '피레네성'(1959)(왼쪽),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애니메이션 영화 '하울의 움직이는 성'의 한 장면(가운데), 제임스 카메론 감독의 영화 '아바타'의 한 장면

이렇듯 인간은 신의 피조물인 동시에 새로운 조형의 세계를 열 수 있는 능동적인 존재다.

우리의 상상력이 만들어낸 발명품들로 인해 우리는 우리 자신의 사고력의 지평을 점점 더 넓혀나갈 수 있고, 그 덕분에 인류의 정신세계의 깊이는 더욱 깊어지고 종류는 더욱 다양해져서 결국은 더불어 향유할 인류의 문화가 한층 더 풍요로워지는 선순환의 흐름을 만드는 것이다.

오늘날엔 도시에도 인어가 살고 있다. 거리를 걷다보면 짧은 구간을 지나는 동안에도 크고 작은 카페를 많이 보게 되는데 그 중에는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커피 매장을 보유한 커피 브랜드 기업의 카페가 있다. 속칭 별다방으로 불리는 이 커피 브랜드의 로고에는 꼬리가 둘 달린 인어가 있다.

그리스 신화에서 뱃사람들을 아름다운 노랫소리로 유혹해서 절대로 빠져나갈 수 없게 만드는 마성의 인어 '세이렌(Siren)'을 모티브로 제작했다고 한다. 별다방의 커피를 한 번 맛보면 그 맛을 잊지 못하고 계속 찾아오도록 로고에 주술을 걸어 놓은 것이다.

▲ 별다방이라 불리는 카페 스타벅스의 로고 변천사(왼쪽),  허버트 제임스 드레이퍼의 작품 ‘오디세우스와 세이렌’(1909)
▲ 별다방이라 불리는 카페 스타벅스의 로고 변천사(왼쪽), 허버트 제임스 드레이퍼의 작품 '오디세우스와 세이렌'(1909)

별다방 로고에 담긴 스토리텔링이 조금은 허무맹랑한 면이 있지만 현대인들은 이를 기꺼이 받아들이며 바쁜 도시의 일상 속 잠깐의 여유를 즐기기 위해 카페 공간으로 모여든다.

기존의 카페가 친구든 연인이든 누군가를 만나는 장소였다면, 별다방 이후의 카페는 혼자서도 노트북을 들고 와서 느긋하게 휴식을 즐길 수 있는 공간으로 그 인식이 확대됐다. 혼자든 여럿이든 휴식과 비즈니스가 모두 가능한 새로운 도시의 라이프 스타일이 만들어진 것이다.

이왕이면 카페 안에 있는 자신의 멋진 모습을 통유리 너머로 누군가 들여다봐준다면 금상첨화다. 한마디로 세이렌의 주술에 사람들이 제대로 걸려든 것이다.

꼬리가 겨우 두 개뿐인 서양의 인어에게 세계인이 이 정도로 푹 빠졌다면, 꼬리가 아홉 개인 우리의 구미호는 '안 봐도 비디오'가 아닐까? 구미호를 만나면 간이나 쓸개 중 뭐 하나는 떼줘야 살아남을 테니 말이다.

■ 조경희 미술팀 전문위원 = 충북대학교 사범대학에서 미술교육학을 전공한 뒤 동 대학원에서 미술교육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충북 단양군에서 교편을 잡은 뒤 미술교사로 재직하면서 충북대학교 미술학과에 출강하며 후배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현재 서울 성수고등학교에 근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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