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중철 논설위원·지속가능연구소 연구위원(경영학박사)
▲ 신중철 논설위원·지속가능연구소 연구위원(경영학박사)

퇴직연금 중 디폴트옵션(default option)의 수익률은 저조했다. 작년 1년간 수익률은 3.85%로 퇴직연금 전체 수익률인 4.77%보다 0.92% 낮았다.

근로자 개인의 퇴직금에 영향을 주는 개인형(확정기여형과 IRP)의 수익률(5.49%)과 비교하면 그 차이는 1.64%포인트로 더욱 커진다.

수익률이 저조하지만, 디폴트옵션이 개인형 적립금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2023년 말 7.1%에서 2024년 말에는 18.5%로 2.6배로 증가했다. 적립금의 수익률에 끼치는 악영향이 더 커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디폴트옵션이 퇴직연금의 수익률을 높이는 데 기여할 수 있다는 논리 중의 하나는 디폴트옵션을 통해 대기성자금의 비중을 낮출 수 있다는 점이다.

투자대상을 지정하지 않아서 투자되지 않고 있는 자금이 대기성자금이다. 여기에는 아주 낮은 이자만 지급된다. 따라서 이들을 정상적인 상품에 투자하게 만들면 수익률이 높아질 수 있다.

그러나 디폴트옵션이 도입된 이후 대기성자금의 비중은 오히려 증가했다. 디폴트옵션이 시행되기 전인 2022년 말에는 개인형 적립금 중 대기성자금이 6.9%였다. 디폴트옵션이 본격적으로 시행된 이후인 2023년 말에는 13.6%로 2배 가까이 증가했으며, 2024년 말에는 15.0%로 증가했다.

디폴트옵션은 낮은 수익률과 대기성자금의 증가는 왜 발생하는 걸까?

디폴트옵션의 문제는 한국의 디폴트옵션이 처음부터 잘못 설계됐기 때문에 발생한다.

디폴트옵션 공식적인 명칭은 사전지정운용제도다. 가입자가 적립금의 운용방법을 스스로 선정하지 아니한 경우 사전에 지정한 운용방법으로 적립금을 운용하는 제도를 말한다. (근퇴법 제2조 제16호).

제도에 대한 정의 자체는 문제가 없다. 딱 거기까지다. 실제 제도운영에는 문제가 많다.

디폴트옵션은 컴퓨터에서 사용하던 용어다. 앱(app) 등 컴퓨터 프로그램은 처음 설치할 때 설정에 필요한 항목들이 자동으로 제시된다. 자동으로 제시되는 이 값들을 디폴트(default)라고 부른다.

디폴트를 그대로 적용하면 별 탈 없이 빠르게 설치되고 충분한 성능을 발휘한다. 물론 원한다면 사용자는 디폴트가 아닌 다른 값을 지정할 수는 있다.

호주나 미국 등 외국은 퇴직연금의 디폴트옵션이 컴퓨터 분야에서 쓰이는 의미와 같게 사용된다. 퇴직연금에 가입할 때 가입자의 성향과 상황에 맞는 디폴트를 제시하여 가입자의 선택을 돕는다. 어떤 선택도 하지 않는 가입자에게는 미리 정해진 디폴트를 적용한다.

한국의 디폴트옵션은 디폴트(자동으로 지정되는 값)가 없는 이상한 제도다.

디폴트옵션에서 '사전에 운용방법을 지정하는 주체'가 근로자 자신이다. 퇴직연금 가입자가 운용상품을 선택하지 않으면 운용방법이 정해지지 않는다. 결국 퇴직연금 적립금은 대기성자금으로 남아있게 된다. 디폴트옵션이 시행되기 전이나 후에 달라진 것이 없다.

오히려 디폴트옵션 도입 후 대기성자금의 비중이 급증하는 역효과가 나타났다. 일정 기간 이상 대기성자금이 유지되면 이를 원리금보장 상품으로 운용해 주던 퇴직연금사업자의 서비스를 디폴트옵션 도입 이후 금지했기 때문이다.

퇴직연금 가입 과정에서 근로자가 선택할 디폴트 상품이 적극적으로 제시되지도 않는다. 결과적으로 근로자에게 가장 적합한 기대수익률이 높은 상품에 가입할 가능성이 높아지지 않았다.

디폴트옵션을 개선하려는 여러 방안이 디폴트옵션 도입 직후부터 논의돼 왔다. 디폴트옵션 적격상품에서 원리금보장 상품을 배제하는 방안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이런 식의 조정은 서로 다른 투자대상을 갖는 등 디폴트옵션을 퇴직연금과 독립된 별도의 제도처럼 보이게 한다. 또 다른 퇴직연금 상품과 경쟁하는 듯한 상태를 고착화시킬 수 있다.

디폴트옵션이 제대로 기능하게 하려면, 디폴트옵션의 정의에 맞게 디폴트옵션을 전면적으로 재설계해야 한다. 디폴트옵션 적격상품 중에서 근로자에게 가장 적합한 상품을 자동으로 제시하며, 운용방법을 선택하지 않는 근로자에게는 자동으로 제시되는 적격상품을 지정한다.

그리고 디폴트옵션을 퇴직연금 가입 단계에서 반드시 거치도록 프로세스를 바꿔야 한다. 그래야만 디폴트옵션이 퇴직연금에 통합되어 같은 목표를 향해 협력하는 관계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신중철 세이프타임즈 논설위원·지속가능연구소 연구위원(경영학박사) = 증권사와 종합금융에서 10년 이상 파생상품과 증권의 리서치와 투자업무를 했다. 펀드평가사에서 20년 이상 기관투자자 등을 대상으로 펀드·연기금·퇴직연금 등의 평가와 컨설팅을 했다. 서울시립대·국민대·한양대 등에서 강사로 활동하며 후학을 양성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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