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공예술(Public art)이라는 단어는 어디까지의 형용사를 수용할 수 있을까?

공공예술(Public art)의 사전적 의미는 거리 공원, 광장 따위의 일반에게 공개된 장소에서 행해지는 예술이나 활동 등을 지칭한다.

그러나 공개된 장소에서의 예술 행위 자체를 모두가 예술이라고 생각하는지는 제고해 봐야 한다.

오늘날의 공공예술 혹은 공공미술은 미국, 일본, 독일 등의 나라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실험되고 오고 있다. 2000년에 들어와서는 우리나라에서도 안양, 서울, 광주 등지로 확산되며 도시재생이나 예술의 민주화 개념과 맞물려 새로운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

우리의 공공미술의 현주소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동안 설왕설래한 공공조형물들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공공미술에 대한 담론은 늘 같은 동선 안에서 맴돈다.

예술인가 흉물인가. 국민 세금을 그렇게 써도 되는가. 공공미술에 공공(公共)이 빠져 있다 등 한결같은 지적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이처럼 공공조형물을 둘러싸고 예술성과 대중성 사이에서 갈등은 늘 있어왔다.

1996년 설치된 포스코센터 앞 프랭크 스텔라의 야외 조각 '꽃이 피는 구조물(Flowering Structure)'은 한국 공공 조각 흑역사의 상징이다.

공공미술이 어떠해야 하는지, 즉 예술이 미술관이 아닌 거리로 나왔을 때 대중과 어떻게 소통해야 하는지에 대해 우리 사회가 처음으로 성찰하게 된 분기점이 된 작품이다. 당시 철거 방침이 알려지자 격렬한 찬반 논쟁이 벌어졌었다.

당시 한 미술 평론가는 언론에 기고한 글에서 "흉물스럽다는 것은 정직한 느낌일 것"이라며 "조형물은 미술계 관계자가 아니라 사회와 대중을 배려해야 한다"고 철거를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주목할 말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절차적인 문제는 중요하다고 주장하며 애초 공공적 논의를 배제한 것이 화를 자초 했다고 강조하는 점이었다.

또한 포스코가 작품 설치 후 재산적, 물리적 관리는 했을지라도 작품이 대중에게 사랑받을 수 있도록 홍보, 교육, 이벤트 등 문화적 관리를 위한 노력을 게을리해온 점을 반성해야 한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논란 끝에 '꽃이 피는 구조물' 아마벨은 살아남았다. 20여년이 지난 지금은 테헤란로의 명품 공공미술로 인식되고 있다. 그 사이 포스코가 기울인 여러 가지 노력이 공공미술로 대중에게 다가가는 데 일조했다.

조형물로 대표되는 공공미술은 단순히 전시장에 있는 작품을 공공 공간으로 옮겨 놓는 것이 아니다. '공공예술(Public art)'은 주변환경과 조화를 이룰 수 있도록 장소를 이해하고 접근해야 한다.

또한 공공이 이해 할 수 있는 예술성과 대중성 사이에서의 문화적 공론화 과정도 필요할 것이다. 전후 맥락에 대한 심각한 고려 없이 그냥 조형물 한 점 놓아둔 것이라면 그야말로 공공미술을 모욕하는 것이 될 수도 있다. 대중과 소통하고 공감하지 못하는 공공미술은 이미 공공미술이 아니다.

김춘수 시인의 '꽃'의 한 구절이 생각난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자나지 않았다.

의미가 되는 것은 그것을 바라보는 시각과 각자가 부여하는 의미일 것이다. 앞으로 공공예술(Public art)이 지향해 나가야 할 접점이 이것이 아닌가 싶다.

대중과 소통하는 공공예술(Public art)이 진정한 공공(公共)이다.

▲ 홍수자 세이프타임즈 문화팀 전문위원
▲ 홍수자 세이프타임즈 문화팀 전문위원

■ 홍수자 전문위원 = 국민대 음악학부를 졸업하고 홍익대 문화예술경영대학원에서 석사학위 받고 박사과정을 하고 있다. 행복을 심어주는 음악강사와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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