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화론적 관점으로 보면 행복은 목표가 아니라 수단이기에, 인간이 생존과 번식을 위한 올바른 트랙(track)으로 가는 데 필요한 것이다. 그러므로 행복하기 위해서 사는 게 아니라, 살기 위해서 행복을 만들어야 한다.'윗글을 쓴 사람이 지지하는 진화론은 DNA의 끝을 상정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한계를 드러냅니다. 인간이 끝없이 생존하며 번식할 수 있을까요. 시종(始終), 처음과 끝의 입장으로 보면 그게 가능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적 시각인 종시(終始), 끝과 시작의 입장으로 보면 영구적인 번성은 처음부
목사·간사·선생이란 삼중점에서 살며 환갑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특별한 일이 생기지 않는 한 고희까지 제게 주어진 공적 시간을 이 위치에서 지내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바람을 버티고 있기에 소득도 있습니다. 여기서 살기 시작했을 때, 허리를 철조망으로 동여맨 한반도의 아픔을 넘어선, 한라에서 백두까지 이어진 희망이 보였습니다.해 아래의 세상에 주어진 것일지라도 삶은 엄정합니다. 손해를 보더라도 받아들인 덕은 보이지 않는 손길로부터 오는 복을 낳고, 개인적 불만을 채우기 위해 인해 벌인 잔치는 화를 부릅니다. 그리고 이런 엄위함으로
저는 오늘날의 셈법으로도 엄마의 노산(老産)으로 태어났습니다. 엄마가 마흔을 넘긴 후에 저를 가졌기에, 또래들의 부모님들에 비해 나이가 많았습니다. 이것 외에도 이러저러한 이유로 친구들의 엄마들을 어린 제가 부러움의 눈으로 바라볼 때가 많았습니다.그런데 더 힘든 건 따로 있었습니다. 철이 들어가면서 복잡한 가족 구성 때문에, 아버지를 따라 시제(時祭)에 가도 족보에 관한 이야기를 듣지 못했습니다. 일제 치하에서 일본군에게 정신대(挺身隊)로 끌려가니 빨리 결혼하라고 겁박 받던 엄마에게, 일본을 왕래하며 일본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던 아버
대안학교에서 가르치는 과목에 독서가 있다고 하면 사람들이 이렇게 묻습니다."독서도 가르치세요." 딸의 요청으로 딸이 다녔던 모 대학 언론매체반 동아리에 가서 강의할 때도 학생들이 이런 반응을 보였습니다. 제가 강의 서두에 "책 읽는 법을 바꿔야 한다"고 했더니 학생이 제게 이렇게 물었습니다."책 읽는 법이 따로 있습니까, 그냥 많이 읽으면 되는 것 아닌가요."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가 미국의 프리스턴대학과 터프츠대학에서 초빙 객원교수로 있으면서 일본 문학을 가르칠 때, 그는 학생들에게 텍스트를 철저히 읽어올 걸 주문했습니다. 그가
영국에서 시작한 경제학을 거시·미시경제학으로 나눈 것처럼, 역사도 연구와 서술 범위에 따라 거시·미시사로 구분합니다. 이렇게 구분하는 이유는 역사를 연구할 때 사용하는 해석 방법의 차이와 해석자가 들여다보는 사료 때문입니다.법정에서 원고와 피고는 소송에서 승리하기 위해 자신의 주장을 입증할 증거자료를 제출합니다. 이때 이게 모두 재판을 위한 증거자료로 채택되지 않습니다. 증거로 제출한 자료가 오염되거나 조작되지 않았는지, 법에서 허락하지 않은 방법으로 부당하게 취득한 게 있는지 따집니다. 그런 후 법률에서 인정한 공적인 증거자료를
어릴 적에 시골에서 천둥이 울린 후 번개가 치면 순간적으로 사방이 밝아지며 길이 보였습니다. 아주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 덕에 갑자기 사위가 어두워지며 비가 왔던 날도, 무서웠지만 당황하지 않고 어둠 속에서 가야 할 길을 찾아 집으로 왔습니다.사방이 다 캄캄하면 아주 작은 빛도 밝게 보입니다. 제가 있는 곳은 아주 작고, 저희가 드러내는 빛도 형형색색의 네온사인처럼 밝지 않습니다. 그래서 아주 캄캄한 곳에 있으면서 빛을 갈구했던 이들이 저희를 찾아옵니다. 어두운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면서 작은 빛의 고마움을 절실하게 느꼈던 사람들이,
역사가 전해준 인간 이야기의 결론은 대개 비극입니다. 금수저를 물고 태어나 영화를 누리는 희극도 가끔 끼어 있습니다만, 대다수가 최종적으로는 유한한 인간임을 확인하고 끝납니다. 빼어난 인간들의 기록도 자세히 보면 바보들의 행진인 경우가 많고, 시행착오를 무수하게 되풀이한 것입니다. 예전에 했던 실수를 오늘은 하지 않아야 한다는 희망은 역사에서 늘 무너진 둑이었습니다. 그리고 오늘날도 이 비극에서 인간이 벗어나기 힘듭니다.범위를 넓혀 인문학적 성찰로 가면 조금 다릅니다. 이를 통해 인간은 동질성의 비극을 가진 다른 존재를 만나고, 이
대학생 때 기독교 잡지에서 신앙집회에 참석했다가 병이 나은 사람에 관한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미국에 살았던 둘은 비슷한 병을 앓았습니다. 그런데 둘이 참석했던 신앙집회에서 한 사람은 병이 나았지만, 다른 사람은 낫지 않았습니다.자기들이 다니던 교회로 돌아온 후 둘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염량세태였습니다. 병이 나은 사람은 이곳저곳에 불려 다니며 간증했고, 강사료 등을 챙겨 상당한 부도 얻었습니다. 그렇지 않은 사람은 그 사람의 믿음을 의심하는 사람들의 냉대 속에 자기가 다니던 교회로 돌아갔고, 그 교회에서 예전부터 했던 일
이사한 후 요즘 날씨를 보면서 '여전히 봄'이라고 해야 할지, '이젠 여름'이라고 해야 할지 헷갈립니다. 단오가 지났으니 여름으로 가고 있다고 해야 하지만, 그래도 벌써 여름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서운합니다. 어릴 적의 기억을 소환해 보면, 이때쯤은 냇가에 가서 멱을 감기에 조금 쌀쌀했었습니다. 7월이 돼야 본격적으로 소(沼)와 같은 곳에 가서 멱을 감았습니다.시골에서 멱을 감을 때는 산에 먹을 수 있는 게 있었습니다. 다만 어설픈 지식으로는 어느 게 먹을 수 있는 것인지 구별하기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동
북향민 중에 대학에 가고 싶다는 이들을 처음 만났을 때 어떤 과목을 가르쳐야 할지 고민이 많았었습니다. 국어만 가르쳐주면 되는 것으로 생각했었다가 현실이 그렇지 않다는 걸 알고 생각이 깊어졌습니다. 대한민국에서 통용되고 있는 대학입학 자격을 얻기 위한 실력을 북향민에게 짧은 시간에 만들라고 요구할 수 없었습니다.그래서 북향민을 가르치면서 알음알음으로 북한의 교육제도와 그곳에서 가르치는 교과목이 어떤 건지 물었습니다. 이들이 그동안 뭘 배웠고 어떻게 자아정체성을 형성했는지 알아봤습니다. 그랬더니 그동안 제가 알고 있었던 한반도 반쪽에
저는 시골에서 자라면서 개구리를 잡아서 닭에게 모이로 줬고, 개구리 뒷다리를 메뚜기와 함께 구워 먹기도 했습니다. 이 둘은 1960~1970년대에 시골에서 자란 아이들에게 간식의 대상이었습니다. 오늘날과 다른 시골 풍경을 갖고 있던 그때는 아이들이 따로 간식을 구해 먹기 힘들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처럼 농약에 중독돼 죽은 야생동물이 거의 없었기에 개구리 뒷다리와 메뚜기는 좋은 간식거리였습니다.두꺼비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어릴 적에 두꺼비는 두려움의 대상이었습니다. 두꺼비가 조준해서 오줌을 누는데, 만약 그 오줌이 사람의 눈에 들어가면
난치병을 앓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병원 저 병원, 유명하다는 병원을 다 돌아다니며 치료받았지만, 병이 잘 낫지 않았습니다.그랬던 그에게 어떤 사람이 간판도 없는 조그마한 병원을 알려주면서 거기를 한번 가보라고 했습니다. 간판도 없는 병원이니 그냥 속는 셈 치고 한 번 들려 봤습니다. 그랬는데 덜컥 병이 나아 버렸습니다.이런 병원이 왜 간판도 달지 않고, 인터넷으로 홍보도 하지 않고 있는지 궁금했던 그가 병원을 운영하는 사람들에게 물었습니다."이런 병원이 왜 이렇게 숨어서 지내요?"그러자 병원에 있는 의사를 비롯한 관계자들이 이구
개성으로 치장한 세상을 좋아하는 사람은, 남과 다른 길을 걷는 게 자기만의 방법으로 살고자 하는 인간의 본성이니,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런 길은 대개 혼자나 한둘이 갈 수 있지 여러 사람이 함께 가기 힘듭니다. 다른 사람들도 마음 놓고 갈 수 있는 큰길이라면 그건 개성이 꽃을 피운 길이 아닙니다.개성의 가치를 인정하지만, 그것보다는 여럿이 어울리는 일반성이 좋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개별성을 무시하지 않습니다. 다만 인간이 사회적 동물이기에 공통분모가 많은 게 주는 폭넓은 평범함을 그들은
성경은 전체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확장'과 이를 위해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에 관한 이야기를 다룹니다. 이걸 핵심적으로 전한 게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님의 말씀이고, 이 중에 에 나온 산상수훈은 기독교인에게 중요한 이정표입니다. 예수님의 뜻대로 살기 위해서는 그분이 말씀한 가치가 우리네 삶 속에서 전반적으로 확장돼야 하는데, 이에 관한 지침이 여기에 집중돼 있습니다.성경은 인간이 하나님이 주신 복인 성령님의 은혜 없이는 살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복을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과 결
1974년에 발표한 로잔언약을 지지하는 아나돗교회가 기독교인으로서 하나님 앞에서 지기로 한 사회적 책임이 교육입니다. 저희는 교육혁명을 추구하는데, 가르치는 '내용'이 아니라 '방식'을 바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게 저희가 생각하는 교육에 관해 명(命)을 혁(革)하는 길입니다.운이 좋아 정부에서 보내주는 청소년 지도자 연수를 겸해 유럽에 있는 청소년 단체를 순방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헝가리를 방문했는데, 부다페스트공대에 대해 들었던 이야기가 지금껏 제 마음에서 방향타가 되고 있습니다. 지금도 헝가리는
시골에서 자랐기에 어렸을 때는 뷔페가 뭔지 몰랐습니다. 흑백텔레비전으로 본 드라마에서 처음으로 뷔페에 초대받은 사람을 연기했던 모 탤런트 덕에 뷔페라는 식당이 있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그때 뷔페가 차려진 음식을 마음껏 먹을 수 있는 식당이란 설명을 드라마에서 연기자의 대사를 통해 듣고, 식당이 손해가 나지 않느냐라는 의문을 품었습니다.뷔페가 만들어진 연원을 보면 서양에서 고급 음식에 뒤처져 질이 낮은 음식을 자기가 원하는 만큼 먹으라고 만든 것이었습니다. 일종의 잡동사니 음식을 모아서 만든 것이었는데, 한국에서는 한동안 고급 음식
'만약에' 말입니다. 남북한이 평화협정을 체결하고, 우리 아이들이 지금보다 나은 한반도에서 살게 된다면 당신은 어떻게 하렵니까. 인간의 눈에 잘 보이지 않는 근원의 세계가 있어서, 그곳에서 우리의 삶이 신령한 몸으로 계속된다면 당신은 어떤 일을 먼저 하렵니까.당신이 지금 최고로 여기는 쾌락이 한계와 후유증을 지닌 것이기에, 그것으로 인한 어려움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는데도 당신은 계속 그것에 몰두하렵니까. 이 말이 '설마 그렇게 되겠어'나 '혹시 ∼가 된다면'이란 가정이 아니라, 그것으로 인
네 권의 복음서 중에 가장 먼저 쓰인 게 마가복음입니다. 역사적 사건에 관한 서술이나 해석에 대해 이견이 있는 경우 최초로 그 사건을 기록한 글을 잣대로 삼는데, 마가복음이 이에 해당합니다. 그래서 복음서에 나온 기록을 비교할 때는 마가복음에 우선권을 줍니다.이런 속성을 갖는 에 나온, 예수님이 하나님을 부를 때 썼던 '아바'는 헬라어가 아닌 아람어로 주로 어린아이의 언어였습니다. 그래서 우리말 번역도 아빠로 합니다. 훗날 이 말의 용도가 확장돼 AD 1세기부터는 나이에 상관없이 자녀들이 아버지를
정형화된 문제 풀이를 위한 공부에 치중하다 보니 우리나라 청소년이 가진 문해력이 학교 성적과 무관한 경우가 많습니다. 학교 성적과 문해력이 아무런 연관 관계를 갖지 못하고, 국내의 성적을 장식하는 용도로만 활용되다 보니, 외국으로 공부하러 가면 그때야 문해력의 필요성을 뼈저리게 느끼고 한탄하는 사람이 많습니다.문해력이 제대로 계발되지 않은 상태로 학교를 졸업하면, 사회에서 벌어진 다양한 사건을 해석하는 틀이 협소해집니다. 인간 사회란 다양한 토의의 쟁점이 서로의 장점을 뽐내는 마당인데, 문해력이 떨어진 사람은 토의 과정에 있는 화면
세탁기의 배수구가 얼었습니다. 인터넷을 검색해서 영상에 나온 방법대로 헤어드라이어로 배수구, 흡수구에 있는 얼음을 녹이고, 서비스센터에 전화해서 온수로 바꿔 작동하는 법을 들은 후 그대로 조치했습니다. 그랬더니 다행히도 세탁기가 돌아갔습니다. 세탁기가 작동되도록 간신히 조치해놓고 책상에 앉아 있는데, 문득 어릴 적 생각이 났습니다.저는 이곳 서울보다 훨씬 아래인 남도의 순천이 고향입니다. 이곳보다는 따뜻했지만, 그래도 마루에 둔 걸레가 얼어 방을 닦지 못했고, 뒷마당에 널어놓은 빨래가 마르지 않고 얼어붙어 방안에 가져다 놓았던 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