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이신 칼럼] 문자적 이해와 상황·맥락적 이해
[정이신 칼럼] 문자적 이해와 상황·맥락적 이해
  • 정이신 논설위원·목사
  • 승인 2022.01.28 1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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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이신 논설위원·목사
▲ 정이신 논설위원·목사

정형화된 문제 풀이를 위한 공부에 치중하다 보니 우리나라 청소년이 가진 문해력이 학교 성적과 무관한 경우가 많습니다. 학교 성적과 문해력이 아무런 연관 관계를 갖지 못하고, 국내의 성적을 장식하는 용도로만 활용되다 보니, 외국으로 공부하러 가면 그때야 문해력의 필요성을 뼈저리게 느끼고 한탄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문해력이 제대로 계발되지 않은 상태로 학교를 졸업하면, 사회에서 벌어진 다양한 사건을 해석하는 틀이 협소해집니다. 인간 사회란 다양한 토의의 쟁점이 서로의 장점을 뽐내는 마당인데, 문해력이 떨어진 사람은 토의 과정에 있는 화면조정시간을 토론장이나 전쟁터로 해석합니다. 그래서 네 해석을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는다는 식으로, 소통하지 않고 소탕하러 덤벼듭니다. 그럼 사회 발전을 위한 어울림의 선율이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군대에서 의무복무를 할 때는 군인으로서의 상황·맥락적 이해를 갖춰야 합니다. 군대는 적의 살상 위협을 막고, 자국민을 보호하기 위한 조직이기에 거기서는 적을 죽이기 위한 훈련을 거침없이 수행해야 합니다. 그래서 군대에서는 장식용으로라도 북한군이 쓰는 계급장을 붙이고 다니지 않습니다. 같은 유니폼을 입고 국가의 명령에 따라 일치단결합니다.

그러나 더불어 의논하며 더 나은 지점을 찾아가는 현장에서는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을 적으로 취급하지 않아야 합니다. 여기서는 다른 의견을 조합해서 더 나은 지점을 찾아가는 게 성장 과정입니다. 이를 문자적으로만 이해하고 큰 그림을 구성하는 상황·맥락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불필요한 싸움으로 인해 주변에 온통 내가 만든 적만 있게 됩니다.

아나돗학교에서 동양고전을 강독하다가 글에 대한 문자적 이해의 한계를 접하게 됐었습니다. 같은 한자인데도 상황·맥락에 따라 다르게 읽어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처음에는 동양고전의 이런 서술 특징이 잘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같은 한자를 문장에서 다른 의미로 쓴 이유가 뭔지 감이 잡히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이게 앞선 사람들의 지혜임을 알게 됐습니다. 문자가 상황·맥락에 따라 다양하게 읽히듯이, 인간의 삶을 단편적인 의미로만 읽어서는 안 되고 생애의 상황·맥락에 따라 읽어야 한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인간의 삶이 복합·입체적이기에 선인들은 인간의 삶이 지닌 특성을 독자가 깨달을 수 있도록, 후학들이 인간의 생애를 여러 각도에서 다양하게 읽을 수 있는 서술 기법을 그들의 저술에 사용했습니다.

현대인은 인간 생애의 전체적인 의미를 따지는 상황·맥락보다는 '그 사람이 한때 어떠했다.'라는 찰나적인 해석을 더 좋아합니다. 그래서 주로 문자적이고 단회적인 인간 이해를 추구합니다. 어떤 사람이 선인이면 선인, 악인이면 악인입니다. 착한 사람이지만 나쁜 사람이었고, 안 좋은 사람이지만 때론 괜찮은 사람이었던 입체적 상황은 기억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네 삶에서 한 번 착한 사람은 영원히 착한 사람이었다가 착하고 좋은 사람일 것이고, 한 번 나쁜 사람은 영원히 나쁜 사람이었다가 나쁘고 악한 사람일 것이라는 평면적 구성은 거의 없습니다. 따라서 자신의 삶을 제대로 이해하고, 자기 옆에서 정신적인 복합골절을 안고 살아가고 있는 이성적 동물인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살려면, 삶에 얽힌 이야기를 문자적으로만 읽지 말고 상황·맥락에 따라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또 자신의 삶을 비문(非文)으로 만들어 놓고서, 다른 사람들이 자기를 상황·맥락으로, 그 일을 추진했던 동기만을 읽어주기를 바라면 안 됩니다. 비문은 메시지가 아니고, 문자 이해의 토대가 없는 상황·맥락적 이해는 불가능합니다. 먼저는 문자로 구성된 올바른 문장을 만들어 놓고, 그 후에 자신을 상황·맥락으로 읽어달라고 해야 합니다.

만약 사이비·이단 교주처럼 '○○이 성경에서 말한 천국'이란 비문을 써놓고, 그걸 상황·맥락으로 봐 달라고 요구하려면, 지구를 떠나 다른 별로 가야 합니다.

■ 정이신 논설위원·목사 △한양대 전기공학과 졸업 △백석대 신학대학원 졸업 △아나돗학교 대표간사 △아나돗공동체 위임목사 △세이프타임즈에 '노희(路戱)와 더불어 책(冊)놀이' 연재, 칼럼집 <아나돗편지(같이 비를 맞고 걸어야 평화가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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