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이신 논설위원·목사
▲ 정이신 논설위원·목사

이사한 후 요즘 날씨를 보면서 '여전히 봄'이라고 해야 할지, '이젠 여름'이라고 해야 할지 헷갈립니다. 단오가 지났으니 여름으로 가고 있다고 해야 하지만, 그래도 벌써 여름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서운합니다. 어릴 적의 기억을 소환해 보면, 이때쯤은 냇가에 가서 멱을 감기에 조금 쌀쌀했었습니다. 7월이 돼야 본격적으로 소(沼)와 같은 곳에 가서 멱을 감았습니다.

시골에서 멱을 감을 때는 산에 먹을 수 있는 게 있었습니다. 다만 어설픈 지식으로는 어느 게 먹을 수 있는 것인지 구별하기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동네 형들이 산에 놀러 갈 때 따라가야 했습니다. 형들에게 물어서 배우지 않으면, 산에 있는 식물의 온갖 열매 중에 먹을 수 있는 걸 분간하기 힘들었습니다. 먹을 수 있는 것으로 착각하고 입에 넣었다가, 열매가 준 쓴맛에 침까지 뱉어내기 일쑤였습니다.

어릴 적에는 멱감는 소와 산이 어울렸던 시기가 주로 여름이었습니다. 명승지에서 관광객을 위한 산은 가을에 열렸지만, 시골에서 저희를 반겼던 뒷산은 여름에 열렸습니다. 시골 아이들에게 가을 산은 겨울을 나기 위해 아궁이를 따뜻하게 만들 땔감이나 나무의 열매를 줍는 노동의 장소였습니다. 그래서 멱을 감다가 슬그머니 들렸던, 땀이 나면 다시 물가로 돌아갔던 여름 산을 저희는 더 좋아했습니다.

그 기억을 되살려 야외 수영장을 개장해야 여름이라고 할 수 있다고 말해보지만, 도시에 살면 이렇게 따지는 게 꽤 어색합니다. 그리고 여기는 벌써 한낮의 열기를 식히기 위해 에어컨이 돌아갑니다. 농사를 짓기 위해 물을 막아뒀던, 시골의 꼬맹이들이 자주 멱을 감았던 제방도 거의 없습니다. 경기도의 모처에 둥지를 틀었는데, 예전에 봤던 남도의 농촌이 아닙니다.

봄이라고 부르든 이젠 여름이라고 봄에 항변하든, 집에서 멀리 있지 않은 친근한 산을 오르기에는 아주 적당한 날씨였습니다. 그래서 기도하러 산에 올랐습니다. 제가 사귄 성령님은 모든 걸 그냥 알아서 해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때로 제가 원하지 않았는데도 알아서 해주시는 게 있습니다. 다만 이런 건 철저하게 하나님께 좋은 일을 제가 모를 때만 그렇게 하십니다.

제가 좋아해서 필요한 걸 조금 얻어보려고, 교회를 찾아가 기도도 하지 않고 일을 진행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때는 성령님의 인도보다 제 의지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했습니다. 고양이 걸음으로 살금살금 골방에서 일을 진행했었는데, 어떻게 아셨는지 그걸 다 알아내셔서, 같이 일을 도모하고 있던 사람과 헤어지게 하셨습니다.

그 일을 겪으면서 제가 원하는 것일지라도, 이 땅에서 크리스천답게 살아가기 위해서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은 우선순위를 뒷전으로 미루며 살았습니다. 그리고 제가 해야 하는 일이라면 꼭 이뤄질 수 있도록 먼저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해 아래 세상에서 살면서 알게 된 성령님의 성품을 보면, 제 사정을 다 아시면서도 꼭 저의 기도를 기다리십니다.

저는 주로 기도하러 산에 가지만, 그럴 때마다 산이 주는 호사가 제게 먼저 다가옵니다. 시골에서 살았고 어릴 적부터 산이 친근한 존재였기에, 산에 담긴 많은 이야기가 제게 말을 건넵니다. 덕분에 나이가 들었어도 외롭지 않게 좋은 친구를 얻었습니다.

기도하러 산에 갔다가, 거기에 있는 친우들이 제게 건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저 역시 그들에게 주저리주저리 제 넋두리를 늘어놨습니다. 사정을 잘 모르는 사람들이 이 장면을 봤다면 이상한 중년이라고 했겠지만, 이렇게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오면 세상의 소음에 찌들었던 마음이 한결 가뿐해집니다.

6월의 산에는 초록이 무성합니다. 초록이 내뿜는 포근함에 젖어 잠시 쉬고 있다가, 이 아름다움을 보고 기억할 수 있는 날이 제게 주어졌기에 감사해서 기도했습니다. 제게 초록의 싱싱함은 찬탄의 대상입니다. 또 올해도 이런 풍경을 제가 볼 수 있게 친구들을 품어준 산이 고마웠습니다. 그래서 넌지시 그들에게 고맙다고 했습니다.

■ 정이신 논설위원·목사 △한양대 전기공학과 졸업 △백석대 신학대학원 졸업 △아나돗학교 대표간사 △아나돗공동체 위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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