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이신 논설위원·목사
▲ 정이신 논설위원·목사

저는 오늘날의 셈법으로도 엄마의 노산(老産)으로 태어났습니다. 엄마가 마흔을 넘긴 후에 저를 가졌기에, 또래들의 부모님들에 비해 나이가 많았습니다. 이것 외에도 이러저러한 이유로 친구들의 엄마들을 어린 제가 부러움의 눈으로 바라볼 때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더 힘든 건 따로 있었습니다. 철이 들어가면서 복잡한 가족 구성 때문에, 아버지를 따라 시제(時祭)에 가도 족보에 관한 이야기를 듣지 못했습니다. 일제 치하에서 일본군에게 정신대(挺身隊)로 끌려가니 빨리 결혼하라고 겁박 받던 엄마에게, 일본을 왕래하며 일본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던 아버지가 사기 치고 결혼해서 시작된 가족이었습니다.

술집 주모였던 유부녀와 정분이 나서 집안의 어른들 몰래 자식을 낳은 후 살림을 차렸던, 만석꾼 양반집 본처의 장손인 아버지가, 자신의 비리를 숨기고자 순박한 시골 처녀를 속이고 결혼한 게 가족의 시작이었습니다. 사기 결혼이 들통나자 문중에서는 아버지에게 족보의 항렬이 들어간 돌림자를 쓰지 말고, 다른 이름을 만들어 쓰라는 벌을 내렸습니다. 그래서 많은 제사를 지내면서도 족보에 관한 이야기는 아버지가 가족에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때 코흘리개 철부지였던 아이가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가 됐고, 그동안 형 둘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해 아래 세상에서 이러저러한 생의 경험을 축적했기에, 모진 인연의 고리는 우리가 가족이란 형태를 지키고 살면 새살로 돋아나서 매듭될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행복한 결말은 쉽게 오지 않았습니다. 마음의 상처는 그냥 흘러가는 것이었고, 아버지와 엄마가 자식들에게 남겨준 상처는 우리가 이걸 서로 안고 사는 것으로 수습되는 것이었습니다.

같은 엄마에게서 태어난 큰형이란 사람이 이사를 가놓고 어디로 갔는지 알려주지 않아서, 집에서 제 식구끼리 추모식을 했습니다. 엄마가 시골 교회에서 권사로 봉직했고, 이렇게 해 달라고 유언을 남겼습니다. 유언에도 한동안 큰형의 고지식함으로 인해 엄마의 제사를 지냈었는데, 이제는 그것도 가보지 못하게 됐습니다.

이 일 외에도 여자 조카가 결혼식을 한다고 연락이 왔는데, 그녀에게 일이 있어 오지 않겠다는 누나 등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가라앉아 있던 불협화음이 수면 위로 모두 드러났습니다. 덕분에 가족이란 이름으로 덜커덕 제게 주어진 아픔을 며칠 동안 앓았습니다.

해 아래 세상에서 살다 보면 나쁘고 좋은 인연을 만납니다. 인연은 어느 것이나 내 마음대로 맺어지는 게 아닙니다. 좋은 인연만 맺고 싶지만, 나쁜 인연을 통해 더 큰 깨달음을 얻기도 하니 그걸 미워할 필요도 없습니다. 주어졌던 악연으로 더 넓고 큰 세상을 보게 됐다면, 그걸로 매듭짓고 고마워하며 정리하는 게 낫습니다.

그런데 가족에게도 이걸 적용하려니 꽤 버겁습니다. 가족이란 이름으로 준 상처가 고마움보다 더 매섭습니다. 이제 어떻게 다시 큰형이란 사람을 볼 수 있을까요. 엄마 제사까지 독점한 채 연락을 끊은 그를 과연 다시 만날 수 있을까요. 누나로 불린 그녀도 마찬가지입니다. 제 몫으로 주어진 엄마의 유산을 가로챈 걸 용서한 게 엊그제인데, 결혼하는 피붙이 조카에게까지 고모로서 무례를 범한 건 쉽게 용납이 안 됩니다.

새살이 돋아나도, 새살은 상처를 덮고 가는 것이지 상처의 흔적까지 없애주지 못합니다. 마음의 상처란 내가 그걸 껴안고 갔을 때 비로소 온전하게 치유됩니다. 그러므로 내가 받았던 상처를 핑계로 남에게 아픔을 주지 않으려면, 상처를 껴안고 사는 내공이 필요합니다. 또 내 곁에 뇌로 연민하는 게 아니라, 가슴에 있는 마음으로 공감하고 다가오는 '상처 입은 치유자'가 있으면 더 좋습니다.

주저리주저리 넋두리해대도 쉽게 풀리지 않던 얼음장 같은 고통의 매듭에, '나도 너와 비슷한 일을 겪었단다. 그러니…'라는 말 한마디가 봄날의 햇살처럼 다가옵니다. 상처 입은 치유자란 성경의 도움이 무척 고마운 날입니다.

■ 정이신 논설위원·목사 △한양대 전기공학과 졸업 △백석대 신학대학원 졸업 △아나돗학교 대표간사 △아나돗공동체 위임목사 △세이프타임즈에 '노희(路戱)와 더불어 책(冊)놀이' 연재, 칼럼집 <아나돗편지(같이 비를 맞고 걸어야 평화가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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