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는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단순하고, 쉽고, 자연스러운 삶의 일반적인 행위가 돼야 한다고 합니다. 이것이 야생마에 올라타거나, 사나운 짐승을 길들이는 것과는 전혀 다른 성질을 지녔다고 합니다. 인류 역사에서 보편적 순교의 시대는 이미 어느 정도 지나갔습니다. 그래서 어떤 이는 이제 예수님 만나는 것을 특별한 목적지를 갖지 않고 떠나는 아침 산책과 같은 것처럼 여길 수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예수님과의 만남을 걸으면서 자연을 느끼는 것 그 자체가 목적인 삶의 나들이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기독교 교리인 삼위일체신론에 따르면 이렇게 생각할 경우, 예수님이 보내셨다는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것은 하나님이 만드신 아침의 산들바람을 즐기는 것이 됩니다. 성령님의 인도하심은 태양과 새들의 지저귐을 즐기는 것이 되고, 그분의 인도하심은 내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받아들여 따르는 일이 됩니다. 또 다른 사람에게 담겨진 아름다운 하나님의 모양을 발견하는 일이 되기도 합니다.

이런 일이 어렵고 힘들다는 것은 그만큼 인간에게 기대하고 싶은 미래가 없다는 뜻으로, 현실이 참 불행하다고 스스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이야기하면 몽상가라고 합니다. 심지어 헛된 꿈으로 사람을 속이려 든다고 돌을 던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진리를 향해 돌을 던지는 순간 다치는 것은 진리가 아니라 돌을 던진 사람입니다.

▲정이신 아나돗학교 대표간사ㆍ아나돗공동체 위임목사
▲정이신 아나돗학교 대표간사ㆍ아나돗공동체 위임목사

다만 이것을 거꾸로 읽으면 예수님을 만나는 일은 아주 위험한 일이 되기도 합니다. 현실을 깨우고 미래를 보는 눈을 뜨게 하기에, 현실적인 쾌락과 감각에 푹 빠진 세상에서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자연스럽게 오해를 불러일으킵니다. 그런데도 성경은 그 예수님을, 따르기도 버거운 그분을 즐기라고 합니다. 진짜 고추장, 초고추장, 태양초 고추장 같은 가르침입니다.

같이 논어(論語)를 배우는 불교신자에게 이런 넋두리를 했더니 그 사람이 저에게 그랬습니다. "그럼 부처님을 따르기는 쉬운 줄 아세요." 헉, 충격이었습니다. 저만 힘들다고 생각했더니 다른 종교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종교의 고수를 따르기가 저에게만 어려운 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어려운 모양입니다.

자로(子路)를 좋아합니다. 공자를 따랐지만 궁핍했던 자신들의 처지를 보고, '군자도 배가 고파야 할 때가 있느냐'고 스승에게 따져 물었던 그의 성격이 저와 비슷하기에 좋아합니다. 예수님의 제자 중에는 자로처럼 스승에게 따져 물었던 사람이 없습니다. 그냥 못 믿겠다고 했다가 부끄러움을 당한 제자들만 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 당신을 따르기가 쉬운 줄 아세요'라고 따져 물을 수도 없습니다.

삶의 고수들과 대화하거나 이들의 길을 따르는 일은 이렇게 늘 어렵습니다. 그런데도 고전(古典)과 경전(經典)은 우리에게 그것을 기쁘게 받아들이라고 합니다. 잘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아는 사람은 좋아하는 사람만 못하고, 좋아하는 사람은 즐기는 사람만 못하다(知之者不如好之者, 好之者不如樂之者)"고 하지만, 아는 것과 좋아하는 것, 즐기는 것이 생각처럼 등급에 맞춰 교환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준비가 필요했습니다. 준비 없이 고수를 만나면 고수가 제시한 길이 위험천만해 보이고, 어렵기 짝이 없습니다. 그러나 준비하고 고수를 만나면 그 길은 내가 즐길 수 있는 길이 됩니다. 베드로나 도마가 준비가 되지 않았을 때는 예수님을 믿지 못했지만, 성령님의 강림으로 준비가 되자 다른 모습을 보였습니다. 또 훗날 자로는 위(衛)나라에서 벼슬하던 중 내란이 일어났을 때 스스로 전사(戰死)를 택하면서, 공자의 가르침에 따라 군자의 예를 갖춰 기꺼이 죽음을 받아들였습니다.

아, 그런데요. 어디에 좀 쉬운 길 없습니까. 있으면 저에게 꼭 알려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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