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나돗학교에서는 동양고전 강독과 인문학 콘서트를 합니다. 모라디오 방송국에서 취재 왔었을 때 이런 커리큘럼을 고집하는 이유를 묻기도 했었습니다. 아나돗학교에 오는 이들은 북향민과 청소년입니다. 이들이 이 땅에서 영원히 10∼20대로만 살 수 없고, 북한과 자유로운 교류가 시작돼도 북한에 다시 돌아가 살 가능성이 거의 없기에 이 두 과목을 꼭 가르칩니다.

운(運)이 좋아서 대학교 때 대학원에 가라는 제안을 받았었습니다. 대학원만 가면 모대기업에서 학비를 지원해 주겠다고 했었습니다. 실력이 좋아서가 아니라 대학을 다닐 때 우리나라의 경기는 호황이었고, 이 덕에 다녔던 학교와 전공학과의 취업률이 꽤 좋았습니다. 동기들은 대학을 졸업하기도 전인 3학년 2학기부터 취업이 돼 있었습니다. 그래서 대부분 대학원에 진학하지 않고 취업했었습니다.

당시 모대기업에서 요구한 것은 군대를 갔다 온 사람으로 대학원에 진학할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공과대학생으로서 군대까지 다녀온 학생 중에 대학원에 진학하려는 이가 거의 없었습니다. 해당되는 사람이 없어서 실력도 별로 없었던 저에게까지 순서가 돌아 왔습니다. 제가 다녔던 학과 교수들은 제발 대학원에 진학하라고, 취업만 하려들지 말라고 성화를 부리던 때였습니다.

▲정이신 아나돗학교 대표간사ㆍ아나돗공동체 위임목사
▲정이신 아나돗학교 대표간사ㆍ아나돗공동체 위임목사

그런데 대학원에 진학할 수 없었습니다. 3학년 이후로 전공에 관해 교수가 하는 말을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었는데 어떻게 대학원에 진학할 수 있었겠습니까. 한참 후에야 이 원인을 알게 됐습니다. 이는 전공이 제 적성에 맞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독서량 부족으로 문해력이 떨어져 전공 개념어를 제가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에 나타난 현상이었습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보니 예전에 학교에서 나름대로 헤매며 갈고 닦았던 기계적인 실력은 그다지 중요한 요소로 작동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대학에서 배운 기술 지식은 기껏해야 5년 이상을 써 먹을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채 5년도 지나지 않아 관련 분야에 대해 새로운 기술이 나오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제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성찰 능력을 요구했습니다.

회사의 입장에서는 어차피 원활한 업무 수행을 위해 사원들을 다시 교육시킬 수밖에 없는 처지였습니다. 그래서 회사에서 요구하는 업무직능교육을 잘 이해할 수 있는, 기초 소양을 갖춘 이들을 신입사원으로 뽑아 교육시켰습니다. 컴퓨터 회사에서 영문학과 졸업생을 신입사원으로 뽑아놓고 자기 회사에 필요한 컴퓨터 관련 기술은 앞으로 회사에서 가르치겠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그들의 입장에서는 훨씬 이익이 남는 장사였습니다.

아나돗학교에서는 북향민에게 앞으로 이 땅에서 아이를 낳고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를 염두에 두고 공부하라고 합니다. 앞으로 낳게 될 아이에게 부모로서 무엇을 가르칠 것인지를 늘 생각해 두라고 합니다. 대한민국에서 미국으로 이민 간 1세대 부모들이 2세대 아이들을 낳아 기르면서 겪었던 고민과 같은 것을 조만간 겪게 될 수도 있다고 합니다.

아메리칸드림(American dream)을 찾아 미국으로 이민 갔습니다. 부모가 미국 사회에 뿌리 내리기 위해 밤 새워 일하는 동안 아이는 부모와 전혀 다른 환경에서 청소년기를 보냈습니다. 결국 아이가 부모와 소통이 잘 되지 않아 길거리에서 방황하게 됐습니다. 이런 형국을 앞으로 북향민이 보게 될 수도 있습니다. 북한에서는 책도 제대로 못 읽습니다. 따라서 가르쳤던 북향민에게 책 읽기를 통한 인문학적 성찰 능력을 꼭 갖추게 해야 했습니다.

인간이 평생을 청소년으로 살아 갈 수 없고, 북향민이 이 땅에서 평생을 20대로 살아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장기적인 안목으로 아나돗학교에서는 이 두 과목을 꼭 가르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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