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터전에서 삶을 시작하는 사람'이라는 뜻의 새터민이라는 용어를 처음 알게 된 것은 대안학교에 온 북한 출신 학생들에게 물어본 것이 계기였습니다. 탈북자라는 호칭이 북한을 탈출의 대상으로만 보는 것 같았고, 자(者)의 뜻풀이에 '놈'이 있어서 마음에 안 들었습니다. 또 제자들을 부르는 좀 더 세련된 이름이 있었으면 해서 그들에게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북한에서 온 제자들이 알려준 호칭이 새터민입니다.

그 뒤 지인의 박사학위 청구 논문에서 이승만(李承晩) 정부 시절인 1950년대 그의 친일파 등용 행적을 보고, 남한이 싫다고 이민을 떠난 사람들을 탈남자(脫南者)라고 불렀다는 자료를 봤습니다. 이후 '탈북자 대 탈남자'라는 조합이 떠올라 탈북자라는 용어를 더 멀리했습니다.

대안학교를 운영하면서 만났던 새터민(북향민) 1세대 사람이 "새터민이 있으면 헌터민도 있어야 하느냐"면서, 새터민이라는 호칭이 자신들을 낮춰 부르는 것처럼 생각돼서 싫다고 했습니다. 또 일부에서는 '새터+민(民)'이라는 조합이 한글의 조어법에 맞지 않는다고 지적하기도 했습니다. 북한 출신 어떤 작가는 '탈북인(脫北人)'이라는 호칭이 어떠하냐는 의견을 내놓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한동안 이 호칭을 다시 생각했었습니다.

▲정이신 아나돗학교 대표간사ㆍ아나돗공동체 위임목사
▲정이신 아나돗학교 대표간사ㆍ아나돗공동체 위임목사

호칭에 대한 논란 때문에 알게 된 것은 새터민이 한글+한자 조합이기에 일반적인 한글 조어법에 맞는 것은 아니지만, 호랑(虎狼)이, 호(胡)떡, 새댁(宅)처럼 우리말에도 한자와 한글로 엮은 단어들이 꽤 있다는 것입니다. 그 뒤 누가 '북한에 고향을 둔 사람'이라는 뜻에서 북향민(北鄕民)이 어떠냐고 제안한 것을 보고 저도 현재 북향민이라는 호칭을 자주 쓰고 있습니다.

딸아이와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팽팽히 맞서는 새터민과 북향민 호칭 논쟁이 여전히 저희 집안의 식탁을 뜨겁게 달굽니다. 저는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는 노래를 초등학교에서부터 배워서 부르고 자랐습니다. 그리고 북한에서 온 사람들을 귀순자 혹은 귀순용사라고 부르라고 학교에서 배웠었습니다. 새터민이라는 호칭을 선호하는 딸아이는 이런 저와 생각이 다릅니다.

제 주변에는 통일을 당위가 아니라 선택으로 생각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제가 만난 젊은 세대 중에는 자신들이 낸 세금으로 유지되는 북향민에 대한 복지와 자기들에게 돌아가야 할 복지 혜택이 북향민으로 인해 줄어드는 현실에 대해 불만을 토로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이들은 대한민국 사회가 북향민을 받아들이는데 자신들의 노력도 포함됐다는 것을 드러내고 싶어 하고, 북향민보다 새터민이라는 호칭을 선호합니다.

어차피 제가 딸아이가 될 수 없고, 딸아이 역시 제가 될 수 없기에 세대 차이는 존재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세대 차이를 좁혀나가는 것일 뿐 이것을 아예 없애지 못합니다. 다만 새터민이라고 하든 북향민이라고 하든 한반도에 평화만 가져다준다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이런 염원을 담아 남북향민(南北香民)이라는 글을 쓰기도 했습니다. 남한 사람이든 북한 사람이든 모두 하나님 앞에서 향기로운 사람이 되자는 뜻에서 이런 글을 썼었습니다.

제가 위임목사로 있는 교회에서는 북한선교라는 말을 쓰지 않고 '통일을 준비하는 선교'라는 말을 씁니다. 북한선교라고 해서 특정 지역을 남한에 있는 교회가 선교해야 한다고 말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기에 이런 표현을 씁니다. 북한에도 아직 지하교회가 살아 있다는 소식이 들려오기에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라는 면에서 보면 이 표현이 낫다고 봅니다.

때로 우리는 친구에게 친근함을 표시하기 위해 아호(雅號)를 만들어 부르기도 하고, 별명을 지어 부르기도 합니다. 따라서 북한이탈주민과 같은 공적 호칭 말고 다른 것을 병행해 써도 되지 않을까요? 공적 문서가 아니라면 이런 호칭들을 굳이 막을 필요는 없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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