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일어나는 갖가지 일을 해석하려는 이론이 많은데, 그것이 내게 주어진 길에 딱 들어맞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한동안 이런저런 해석의 틀을 따라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더 이상 다른 사람이 정했거나 해석했던 사고의 틀에 맞춰 살기가 싫어졌습니다. 저에게 주어진 삶의 경로를 설명할 수 있는, 설(說)이나 론(論)이 아닌 칙(則)을 찾고 싶어졌습니다.

하는 일 때문에 많은 사람을 만나 보니, 어떤 사람은 망(亡)하는 것이 복(福)이었고 어떤 사람은 귀(貴)해지는 게 복이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당사자는 자신이 망해야 복이 되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한탄만 하면서 살거나, 복이 아닌데도 귀하게 되기 위해 물질을 잡고 사람을 놓치고 있었습니다. 물질은 부차적으로 주어지는 것이고 진짜 복은 사람인데, 그들은 무리하게 귀하게 되고자 물질에 이어 사람마저 놓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대체적으로 사람이라는 복을 받기 두려워하며 물질과 쾌락을 챙겼습니다. 저는 이를 막기 위해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가 원죄를 짓도록 내버려 두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일반론이 적용되지 않는 생의 경로를 가진 이에게, 때론 망하는 것이 복임을 받아들이게 하는 설명법으로는 원죄의 틀만한 해석이 없기 때문입니다. 죄인이기에 십자가 지는 것을 기꺼이 복으로 여기며, 내 것을 주장하지 않고 서로 나누며 살아야 합니다.

▲정이신 아나돗학교 대표간사ㆍ아나돗공동체 위임목사

인간의 원죄를 이야기할 때 꼭 나오는 이가 여자입니다. 히브리어 '첼라'는 구약성경에서 대부분 '옆구리, 편(side)'으로 번역하는데, <창세기>는 '갈빗대'로 번역합니다. 하나님은 아담의 갈빗대 하나로 하와를 만드셨고, 아담은 하와를 '뼈도 나의 뼈, 살도 나의 살'이라고 뼈뿐만 아니라 '살'을 함께 말했습니다. 이는 갈빗대로 번역한 '체라'에 '옆구리'라는 뜻이 포함돼 있기에 가능한 표현이고 번역입니다.

한국어의 표현에서는 가족관계에서 핏줄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만, 히브리인들은 이를 '골육(뼈와 살)의 관계'로 이해했습니다. 아담이 하와를 '뼈도 나의 뼈, 살도 나의 살'이라고 부른 것은 아주 가까운 최상급의 혈연관계라는 뜻입니다. 또 히브리어에서 뼈와 살이라는 단어가 한 쌍으로 나타나면, '처음부터 끝까지'라는 총체적인 의미도 있습니다.

고대 중동에서 갈빗대는 아랍인들에게 '절친한 친구'를 상징했고, 수메르 언어로는 '생명'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창세기>에서도 여자는 뼈'만' 아담의 뼈가 아니라 살'도' 아담의 살입니다. 그래서 하와의 역할도 자녀 생산에 국한되지 않았습니다. 하와는 아담과 서로 파트너 관계, 서로에게 도움을 주는 존재였습니다.

하와는 아담의 갈빗대에서 나왔으나 결혼으로 아담의 '뼈와 살'이 됐습니다. 이처럼 부부는 서로 동반자이면서, 서로를 도와주는 도우미가 돼야만 한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시편 118장 7절에 의하면 하나님은 '내 편'이 되셔서 나를 도와주십니다. 이 표현을 통해 유추해 보면 여자는 남자에게 하나님의 도움이 들어오는 통로이며, 안해가 없으면 남편은 하나님의 도움을 받기 힘들어집니다(잠언 18:22; 19:14, 디모데전서 4:1∼3).

또 히브리어 '여자(잇샤)'는 '남자(이쉬)'에서 파생된 말로, 발음이 비슷합니다. 이것은 남녀의 유사성과 구별을 동시에 의미하는 언어유희로써, 남자나 여자가 같은 본질임을 드러냅니다. 남자가 여자보다 우월한 것 같이 행동하지만, 실제로는 '그 놈(男)이 그 년(女)'인 것처럼 같은 등급의 존재입니다.

성경에 따르면 원죄는 남녀 둘이 같이 지고 가야 합니다. 이처럼 남녀가 같이 지고 가야 하는 것인데, 오랫동안 여자만의 몫으로 오해됐던 것이 있습니다. 남성 여러분! 이제 당신의 아이를 기르는 일에 하와와 함께 해 보시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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