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나돗 편지] 행복한 선택
[아나돗 편지] 행복한 선택
  • 정이신 논설위원
  • 승인 2019.10.05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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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님이 시골교회의 담임목사였던 고등학교 동기 하나가 학생운동을 하다가 A대를 거쳐 B대로 갔습니다. 이후 B대를 다니다 그만두고 노동운동, 통일운동을 했습니다. 그는 A대에서 제적당한 후에 다녔던 B대를 자퇴한 후 서울 생활을 접었고, 고향으로 돌아가 스스로 '노가다대(大) 지게과(科)'를 졸업했다며, 노동자문학회 활동을 했습니다.

그는 대학생 때 학생운동을 하면서 옥고(獄苦)를 치렀고, 이때 받은 고문 후유증으로 투병하다 몇 년 전에 하늘나라로 갔습니다. 그런데 끝까지 투병하는 모습을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싫다면서 굳건하게 자존심을 지켰습니다. 그래서 그가 투병생활을 했다는 것도 그의 부음과 함께 알게 됐습니다. 출소와 자퇴 이후에 전국의 건설 현장을 전전하던 그에게 야훼 하나님이란 어떤 존재였으며, 학생운동, 노동운동, 통일운동이란 어떤 것이었을까요.

A대에서 그와 같이 활동했던 고등학교 동기 한 명은 그와 고향이 같습니다. 대학교에서 제적당하고 막노동을 하며 사는 것이 안쓰러워서 친구들이 옛정을 모아 그가 국회로 가는 것을 도왔습니다. 그랬더니 국회에 가서도 옛 버릇을 못 버리고 국회사상 초유의 일을 저질러 면직됐습니다. 국회의원에서 면직된 동기가 병마로 투병하던, 대학교에서 같이 학생운동을 했던 그를 얼마나 도왔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정이신 아나돗학교 대표간사ㆍ아나돗공동체 위임목사
▲정이신 아나돗학교 대표간사ㆍ아나돗공동체 위임목사

제가 태어난 곳은 남도의 한적한 도시였습니다. 그리고 병마로 죽은 동기의 고향은 제가 태어난 곳에서도 비포장도로로 몇 시간을 더 가야 하는 곳이었습니다. 고문 후유증으로 인한 병마로 죽은 그가 왜 사회담론운동에 뛰어들었는지를 저는 대충 압니다. 그때 그 시절에 대학으로 진학한 저희에게는 별다른 사회운동의 대안이 없었습니다.

세월이 준 교훈 때문에 저는 더 이상 거대담론과 순수 정의를 방패막이로 동원한 사회운동을 잘 믿지 않습니다. 저의 판단으로 그것은 허상일 경우가 많았고, 기독교 사이비·이단과도 너무 비슷했습니다. 포장된 사회운동은 사이비·이단 교주처럼 거대하고 정의롭다는 명분을 만들어 사람을 끌어다 쓰고, 나중에는 스스로 선택한 것이었으니 네가 알아서 하라고 아무렇게나 던져 버렸습니다. 이 과정에서 그럴싸하게 포장해 동원했던 사회적 명분은 때로 올무처럼 작용했습니다. 사람을 얽어매 빠져나가기 힘들게 조일 수 있다는 허울 좋은 명분의 실체를 잘 알지 못 하면 그 틀을 벗어나기 쉽지 않았습니다.

이 땅의 북향민이 잘 빠지는 통일운동의 논리에도 위와 비슷한 면이 있습니다. 이 땅에 통일운동을 할 사람이 없어서 북향민에게 통일운동을 하라고 부추기거나 꼬드기는 것이 아닌데, 일부가 너무 잘 속습니다. 약삭빠르게 계산해 일을 벌이는 일부 몰지각한 사람들의 부추김에 속아 북향민이 스스로를 아주 대단한 통일의 역군인 것처럼 생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다가 나중에 찬밥 신세가 됩니다.

자유는 공짜가 아니기에 이 땅에서 누리는 모든 혜택에도 되갚아줘야 하는 몫이 있습니다. 주어진 정착유예기간이 지난 후에도 자립할 수 있는 사회인이 돼 있지 못하면, 결국은 능력이 부족한 소수 소외계층이 됩니다. 이는 죽은 동기나 북향민, 사이비·이단 집단에 속아 시간을 허비한 그들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도 적용되는 원리입니다.

허상을 허상으로 볼 수 있는 눈이 필요하고, 실재를 실체로 인정할 줄 아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죽은 동기가 봤던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C대를 다니며 학생운동을 했던 친구 한 명이 얼마 전에 모대기업의 상무가 됐다는 소식을 접하면서, 우리 삶에 있는 허상과 실재가 무엇인지 다시 생각해 봅니다. 학생운동을 했었지만 진로를 바꿔 죽은 그가 비판하던 대기업의 상무가 된 또 다른 동기, 그리고 목사가 된 저. 우리 모두 다 행복한 선택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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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나믹안 2019-10-05 19:54:07
명분과 허상...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그리스도의 것은 그리스도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