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우리집에는 능소화가 한 아름 피곤 했다. 처음에는 자그마한 넝쿨처럼 시작되더니 해가 갈수록 탐스럽게 담장을 덮었다.
능소화의 색감은 참 독특하다. 오렌지빛과 주황이 어우러진 꽃은 어느 곳에 피어도 아름다움을 뽐냈다. 때론 담장을 덮고, 때로는 전봇대나 나무기둥을 휘감고 돈다. 풍성하고 그윽한 아름다움이다.
능소화가 피는 계절이 되면 우리집도 덩달아 바빴다. 한 창 몰려올 더위와 장마에 대한 대비다. 선풍기를 닦고 모기장을 점검하고 배수구를 확인하곤 했다.
그러나 여름은 언제나 우리의 준비보다 먼저 다가온다. 순식간에 몰려온 더위는 능소화만큼이나 빠르게 담장을 덮는다.
능소화가 필 때면 어머니는 하늘높은줄 모르고 뻗어가는 자태에 감탄하곤 하셨다. 그리고는 늘 상 말씀하셨다.
"작은 나무로 시작해 담장을 덮고 여름 하늘을 수놓는 경이로움은 작은 지지대 하나로 시작된다."
아마도 우리 삶에 있어서 좋은 친구와 스승 그리고 배움을 얻으라는 말씀 같았다. 그 모두 우리에게는 필연적인 지지대가 아닌가.
능소화는 비 바람이 불면 속절없이 떨어진다. 꽃이 통째로 떨어지는 모습은 마치 동백과 같고 바닥을 물들인 꽃잎은 흡사 목련을 닮았다. 동백과 목련도 그렇지만 능소화가 떨어지는 모습을 보면 왠지 애잔한 느낌이 든다.
능소화에는 슬픈 전설이 있다. 사랑하는 님을 그리며 애타게 담장너머를 바라보던 한 여인이 죽어 능소화가 되었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능소화는 담장에 많이 피고 님을 보기 위해 높은 곳으로 뻗어 오른다고 한다.
봄을 저 만치서 맞이한지가 엊그제 같은데 여름은 벌써 우리 머리맡에 앉아 있다. 올 여름은 유례없는 더위로 고생할 것이라는 겁나는 뉴스도 나온다. 동네 어귀마다 때맞춰 피어나는 능소화를 반길 틈도 없이 이제 또 '유례없는' 장마를 맞이하게 된다.
낭만과 정열로 뜨거웠던 젊은 날의 여름은 이제 습하고 걱정거리 가득한 계절로 퇴행했다. 주말에 내린 태풍 급 강풍을 동반한 비에 능소화의 낙화도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능소화가 지고 나면 우리에게 어떤 여름이 찾아올까. 산으로 들로 채집을 나서던 그 시절이 찾아올까. 강으로 바다로 뜨거운 추억을 남기던 정열이 찾아올까. 아니면 냉방이 잘 된 실내로 더 깊숙이 숨어들까. 아마도 그럴 것 같다.
계절이 상실된 시대. 꽃 도 사람도 모든 것이 상실되어 버렸다. 내년에도 능소화는 때맞춰 피어 줄까. 여름의 전령으로 우리들에게 벅찬 아름다움을 선물해 줄까. 벌써부터 가슴 졸이며 기다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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