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바람 휘날리며 흩날리는 벚꽃 잎이…'
버스커 버스커의 '벚꽃 엔딩'으로 시작된 4월, 소란했던 올 봄도 어김없이 벚꽃은 피었다.
하얀 봄날 찬란한 꽃 무리는 추웠던 겨울을 기억하고 있다. 차가운 콘크리트 바닥에서 촛불을 들고, 비닐 한 장에 의지해 하얀 눈서리를 맞으며 견딘 사람들에게 왕관처럼 빛나던 꽃. 그 강렬하고도 짧은 생은 오늘 봄비와 함께 서둘러 지고 있다.
우리나라의 봄은 진달래와 개나리의 화려함과 목련의 단아함으로 시작된다. 그 꽃잎 색이 바랠 때 벚꽃은 새로운 천지를 창조한다. 강렬하고 화려하며 하늘을 덮는 위용은 짧은 생과 함께 우리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준다.
천지를 호령하듯 장엄하지만 한 줄기 봄비에 처연하게 떨어지고 어느 바람결에도 한줌 꽃잎으로 흩어진다. 누구에게는 슬픔으로 누구에게는 아련함으로 다가오는 꽃이다.
벚꽃의 원산지는 흔히 일본으로 알고 있다.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 학명은 'Prunus yedoensis' 일본의 에도(지금의 도쿄)에 서 이름을 따왔다. 오래전부터 '사쿠라(桜)'로 불리며 봄의 상징으로 여겼다.
우리가 '사쿠라'를 가짜나 변절자로 의미하는 것은 아마도 피자마자 떨어지는 벚꽃의 이미지를 상징한 것 같다.
왕벚나무는 제주도 자생설과 일본 기원설이 있지만 지금 우리가 거리에서 흔히 보는 벚꽃은 대부분 일본에서 들여온 품종이다. 그러나 산에서 자라는 왕벚나무는 토종일 가능성이 크다.
벚꽃은 늘 '끝'을 품고 있다. 꽃망울이 여물 때부터 이별을 준비하는 꽃. 벚꽃의 낙화(落花')는 늘 아쉬움을 준다. 아마도 사람들은 이러한 매력 때문에 벚꽃을 사랑하는 것 같다.
아무리 시작이 찬란했어도 그 끝을 아는 꽃, 짧지만 우리에게 모든 것을 보여주는 꽃, 색이 바래며 몸부림치지 않고 한 번에 생을 마감하는 무사 같은 꽃. 나 또한 이런 이유로 벚꽃을 사랑한다.
우리도 살아가면서 '벚꽃 엔딩'같은 순간을 맞이한다. 화려한 생일지라도 언젠가 끝을 맞이하는 삶. 시간이 지나면 내려놓아야 하는 허망한 권력, 세상을 다 가진 듯 떵떵거려도 결국 빈손으로 묻혀야 하는 인생. 벚꽃은 이러한 우리의 삶에 강렬한 지침을 남겨준다.
끝이 올 걸 알면서도 최선을 다해 피어나는, 그 속에 담긴 전부를 우리는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 시간이 흘러 또다시 봄이 오면 우리는 다시 '벚꽃 엔딩'을 들을 것이다. 그러면 버스커 버스커는 또 '벚꽃 연금'을 받겠고 우리는 짧지만 참 아름다운 시간을 보낼것이다.
그렇게 세월은 반복되고 우리는 또다른 겨울과 봄을 맞이할 것이다. 기나긴, 그러나 가열한 지난 겨울로 인해 올 봄은 정말 찬란하고도 아름답다. 벚꽃은 그러한 우리의 기쁨을 배가시켜 주었다. 참 고마운 꽃이다. 안녕 벚꽃, 내 년에도 너의 찬란한 슬픔이 우리에게 위로가 되어 주길 바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