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올해도 습관처럼 어버이날이 다가왔다. ⓒ 김춘만 논설위원
▲ 올해도 습관처럼 어버이날이 다가왔다. ⓒ 김춘만 논설위원

삼월 꽃샘 추위가 기승을 부리던 날 어머니는 정신이 반쯤 나간 상태로 급히 나가셨다. 어린 남매는 어머니가 쥐어 준 10원짜리 몇 장을 쥐고 속절없이 좋아라 했다. 저녁이 되자 이웃집에서 급히 우리를 불러 어디론가 데려갔다.

그 때 아버지의 죽음을 보았다.

퇴근 후 건하게 술 한잔 걸친 아버지를 택시가 치었다. 택시기사는 겁에 질려 난지도 쓰레기장으로 향했고, 아직 숨이 붙어있는 아버지를 그곳에 버렸다. 아버지를 유기한 택시는 마침 단속 중이던 경찰에 잡히고, 아버지는 영등포에 있는 한 병원으로 옮겨졌다.

그러나 신분증이 없다고 병원측은 아버지를 그대로 방치했다. 그때도 아버지는 숨이 남아 있었다.

아버지의 주검을 영안실 바닥에서 마주한 순간 눈물조차 나오지 않았다. 동틀 무렵 교회 새벽 종소리에 놀라 잠에서 깨었다. 그때서야 아버지의 죽음이 실감났다.

막걸리를 좋아했던 아버지는 막걸리 심부름 값을 항상 후하게 주셨다. 가끔 숨이 막힐 정도로 안아주면 아버지의 땀냄새가 코를 찔렀다. 아버지의 냄새. 아직까지 교회 새벽종소리와 아버지의 땀냄새가 지워지지 않는다. 아버지는 슬픔이자 아련함이다.

40대 젊은 어머니는 하루아침에 혼자가 되었다. 불행히도 아버지는 재산을 남기지 못했고, 보상금으로 받은 돈마저 가까운 친척이 횡령했다. 건사할 자식은 다섯. 그러나 어머니의 황망함은 오래가지 않았다. 당시 이 땅의 어머니들이 대부분 고달픈 삶을 사셨지만 우리 어머니는 그 선두에서 치열하게 사셨다.

그렇게 완고하고 철저했던 어머니도 세월은 비껴가지 못했다. 점점 말수가 줄어들더니 인지능력마저 약해졌다. 세월은 바위처럼 강했던 어머니를 결국 요양원 보호를 받게 만들었다. 최대한 가까운데 모시고 열심히 찾아갔지만 그래도 당신 집만 하겠는가. 어머니의 말년은 요양원의 낯설고 쓸쓸함 이었다. 지금도 못내 가슴 아픈 시간이다.

어머니가 보호자이던 시절 어머니가 해주는 모든 것이 당연하게 생각되었다. 어머니는 여자이기에 앞서 전사였고 모든 것을 해탈한 존재로 보였다. 욕심도 없고 무서움도 모르는 사이보그 같은 존재.

그러나 어느 날 외출하려고 화장대에 앉아 계신 어머니를 보고 왈칵 눈물이 날 뻔했다. 햇살 고운 창가에서 등이 굽은 채 얼굴을 만지시던 어머니. 아. 어머니도 그저 평범한 여자였구나. 그걸 아는데 너무나 오랜 시간이 걸렸다.

여름이 막바지에 이르던 날 어머니는 성격만큼이나 깔끔하게 돌아가셨다. 연락을 받고 30여분 거리인 요양원에 급히 달려갔으나 그새 어머니는 숨을 거두셨다. 사전 징조도 없이.

"미안하다"는 말 밖에 나오지 않았다. 그 말만 내내 되새겼던 것 같다. 미안함. 왠지 그 말 외에는 생각나는 말이 없었다. 오랫동안 내 삶을 지탱해 주셨던 어머니. 내게 어머니는 그저 미안함이다.

올해도 어김없이 어버이날이 찾아왔다.

부모님의 나이를 살고 있는 지금 우리는 매일 매일이 처음 살아보는 날이다. 이때 우리 부모님은 어땠을까 상상해 본다. 얼마나 떨리고 불안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계셨을까.

오늘은 부모님께 전하지 못하는 편지라도 한 장 써야겠다. 너무 늦게 당신들의 삶을 어렴풋이 나마 이해한다고, 그리고 당신들이 내게 존재했던 의미를 알겠다고, 당신들은 여전히 내 부모이니 힘들고 외로울 때 투정 좀 부리겠다고 말하고 싶다.

그리고 살아생전 한 번도 전하지 못한 말도 하고 싶다.

"사랑합니다. 아버지,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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