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위, 중대재해 금융 대응 간담회 청사진 공개
여신심사·ESG평가·공시연동 기업안전경영 유도
사고예방은 비용아닌 투자 '패러다임 전환' 시도

▲ 권대영 금융위원회 부위원장이 19일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중대재해 관련 금융부문 대응 간담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 금융위원회
▲ 권대영 금융위원회 부위원장이 19일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중대재해 관련 금융부문 대응 간담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 금융위원회

"일하러 갔던 산업현장에서 목숨을 잃거나 큰 부상을 입는 안타까운 희생이 반복되고 있다."

권대영 금융위원회 부위원장의 비통한 발언처럼, 산업현장 재해는 더 이상 외면할 수 없는 사회적 문제가 됐다.

정부와 금융권이 산업 현장의 비극을 끊어내기 위한 가장 강력하고 실질적인 칼을 빼 들었다.

중대산업재해를 일으킨 기업은 은행 대출 문턱이 높아지고, 투자 유치가 어려워지는 등 금융의 모든 영역에서 강력한 '페널티'를 받게 된다.

반면 안전 관리에 힘쓰는 우수기업은 금리 인하 등과 같은 확실한 '인센티브'를 받게 된다.

금융위원회는 19일 권 부위원장 주재로 금융감독원, 한국거래소, 은행연합회, 정책금융기관 등 금융권 핵심 기관이 참석한 가운데 '중대재해 관련 금융부문 대응 간담회'를 개최했다.

이 자리에서 공개된 청사진은 중대재해를 기업의 핵심적인 신용 및 투자 리스크로 명확히 규정된다는 점이다.

여신, 자본시장, ESG 평가 등 금융 시스템 전반을 연계해 기업의 안전경영 문화를 뿌리부터 바꾸겠다는 구상을 담고 있다.

▲ 금소노조가 금호타이어 노동자 사망사고와 관련해 중대재해 처벌을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 금속노조
▲ 금속노조가 금호타이어 노동자 사망사고와 관련해 중대재해 처벌을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 금속노조

◇ 산업재해 '금융 리스크'로 명확히 규정

이번 정책의 가장 중요한 출발점은 산업재해를 바라보는 시각의 근본적인 변화다. 금융당국은 중대재해에 대한 행정제재와 처벌이 강화되면서 재해 발생이 이제 "기업의 신용·투자 리스크를 확대시킬 수밖에 없다"고 명확히 규정했다.

단순한 선언이 아니다. 실제로 지난 5월 중대재해가 발생한 A사는 사고 발생 후 단 5영업일 만에 주가가 8.2%나 급락했다. 2023년 4월 아파트 지하주차장 붕괴 사고가 발생한 B사는 신용등급이 A+에서 A0로 강등되는 직격탄을 맞았다.

사고로 인한 공장 가동 중단, 막대한 행정 과징금, 소송 비용, 치명적인 평판 하락은 기업의 현금 흐름을 악화시켜 대출 상환 능력을 떨어뜨리고, 미래 성장 가능성을 잠식해 기업 가치를 떨어뜨린다.

권 부위원장은 "리스크가 확대된 만큼 건전성 관리와 투자자 보호를 위해서는 금융권의 선제적 관리와 대응이 필요하다"며 "자금중개라는 금융의 본질적 기능과 리스크 관리라는 내재적 특성을 활용해 중대재해 근절과 같은 사회적 문제 해결에 금융이 기여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 권대영 금융위원회 부위원장이 19일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중대재해 관련 금융부문 대응 간담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 금융위원회
▲ 권대영 금융위원회 부위원장이 19일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중대재해 관련 금융부문 대응 간담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 금융위원회

◇ 깐깐해지는 대출 문턱 '재해 이력'이 꼬리표

가장 즉각적이고 강력한 변화는 기업의 자금줄인 여신부문에서 시작된다.

권 부위원장은 "중대재해 발생이 대출규모와 금리, 만기연장 등 여신상의 불이익이 되도록 금융권 심사체계를 개선하겠다"고 단언했다.

이러한 변화는 대출의 전 과정에 적용된다. 기업이 신규 대출을 신청할 때부터 중대재해 이력은 금리와 한도를 결정하는 핵심적인 평가 요소로 작용하게 된다.

신규 대출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대출을 받은 기업이라도 대출 약정서에 '중대재해 발생 시 한도대출의 한도를 축소하거나 인출을 제한할 수 있다'는 조항이 반영돼 안심할 수 없게 된다.

대출 만기 연장 심사 시에도 안전관리 수준이 중요한 잣대가 돼 재해 발생 기업은 금리 인상이나 한도 축소를 감수해야 할 수 있다.

이같은 변화는 산업은행, 기업은행 등 정책금융기관이 시장에 확실한 신호를 주며 선도하고 민간 금융권으로 확산시켜 나간다는 것이 금융당국의 구상이다.

부동산 PF 보증 심사나 시장안정 프로그램 지원 대상 선정 시에도 중대재해 이력이 페널티 요인으로 작용하게 된다.

▲ 국정기획위원회가 이 대통령의 지시에 따른 산업안전 대책으로 중대재해처벌법 양형 기준 마련 방안을 검토한다. ⓒ 세이프타임즈
▲ 국정기획위원회가 이 대통령의 지시에 따른 산업안전 대책으로 중대재해처벌법 양형 기준 마련 방안을 검토한다. ⓒ 세이프타임즈

◇ 숨길 수 없는 리스크, 자본시장이 감시한다

자본시장에서도 투명성을 높여 투자자들의 압박을 유도한다.

먼저 신속한 공시가 의무화된다. 기업이 산업안전보건법에 따라 중대재해 발생 사실을 고용노동부에 보고하면 즉시 한국거래소를 통해 시장에 공시하도록 해 모든 투자자가 관련 정보를 투명하게 알 수 있게 된다.

ESG 평가에 직접 연계된다. 중대재해 발생은 ESG 평가의 'S(사회)' 항목 점수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 ESG 투자를 중시하는 국내외 연기금 및 자산운용사의 투자 대상에서 제외되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

금융위는 이를 위해 ESG 평가기관 가이던스를 개정, 기관투자자들이 중대재해에 대한 수탁자 책임을 다하도록 '스튜어드십 코드'에도 관련 내용을 반영할 필요가 있다고 언급했다.

▲ 이재명 대통령이 SPC삼립 허영인 회장을 바라보며 최근 사고에 입장을 밝히고 있다. ⓒ 이재명 대통령 페이스북
▲ 이재명 대통령이 SPC삼립 허영인 회장을 바라보며 최근 사고에 입장을 밝히고 있다. ⓒ 이재명 대통령 페이스북

◇  '안전투자' 기업은 확실한 보상

이러한 강력한 압박의 반대편에는 확실한 '당근'도 내놨다. 정부는 이러한 노력이 단순한 처벌이 아닌 기업의 근본적인 체질 개선을 유도하기 위함임을 분명히 했다.

권 부위원장은 "중대재해 예방에 필요한 자금을 지원하고, 잘하는 기업에 대해서는 대출을 확대하고 금리를 낮추는 등 인센티브를 제공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이는 기업의 사전예방 노력을 촉진해 중대재해 리스크를 원천적으로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안전관리 우수 인증을 받거나 높은 평가등급을 받은 기업은 실질적인 금융비용 절감 혜택을 받게 되고 노후 시설 개선이나 안전 컨설팅을 위한 자금 지원도 받을 수 있다.

신용정보회사가 기업의 안전보건 관리체계를 전문적으로 평가하고 컨설팅을 제공하면 금융회사가 그 결과를 믿고 안전시설 개선 자금을 지원하는 구조다.

▲ 8일 노동자가 추락해 숨진 DL건설 e편한세상 신곡 시그니처뷰 아파트. ⓒ 세이프타임즈
▲ 8일 노동자가 추락해 숨진 DL건설 e편한세상 신곡 시그니처뷰 아파트. ⓒ 세이프타임즈

◇  중대재해 정보 집중·공유 체계 구축 필요

간담회에서는 제도의 실효성을 높이기 위한 방안으로 '중대재해 정보 집중 및 공유 체계 구축'이 필요하다는 제언이 나왔다. 신용정보원은 관련 인프라 개선을 구체화하겠다고 화답했다.

금융위는 간담회에서 공유된 의견을 바탕으로 고용노동부 등 관계부처와 협력해 조속히 방안을 구체화할 계획이다.

권 부위원장은 "이제 우리 사회도 중대재해 근절을 위한 노력을 비용으로 보지 않고 회복 불가능한 손실을 절감하는 투자로 인식해 나가야 할 것"이라고 역설했다.

권 부위원장의 말처럼 이번 금융부문의 다각적인 노력은 한국 사회의 중대재해 예방 문화 안착을 선도하는 중요한 변곡점이 될지 관심이 모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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