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기술 패권 경쟁의 중심이 빠르게 이동하고 있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주요국의 전략 키워드는 반도체였다.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AI, 인공지능이 새로운 지정학적 힘의 원천으로 떠오르고 있다.
미국과 중국의 AI 패권 경쟁은 이미 현실이다. 미국은 영국·캐나다 등과 AI 대서양 동맹을 구축해 서방 중심의 생태계를 주도하고 있다.
중국은 UN 결의안을 바탕으로 개발도상국을 포섭하며 글로벌 AI 질서에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다.
프랑스는 자력으로 AI 강국의 입지를 굳히며, 아프리카 시장 진출을 꾀하고 있다. AI를 둘러싼 전 지구적 경쟁이 이미 시작된 것이다.
AI는 단순한 기술이 아니라 국가 안보와 경제 주권의 핵심 자산이 되고 있다. 핵우산 없는 전장에 홀로 나가는 병사처럼, AI 인프라를 외부에 의존하는 국가는 새로운 기술 패권 질서에서 주체가 되기 어렵다.
우리 정부가 기술 전문가를 초대 AI수석으로 임명한 것 역시 이러한 흐름을 반영한다. 클라우드, 반도체, 생성형 AI 등 AI 기술 전반을 꿰뚫는 전문가를 전략의 전면에 세운 것은, AI를 남의 서버에서 돌릴 수 없는 시대가 시작됐음을 선언한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은 이 치열한 경쟁 속에서 어떤 전략을 취해야 할까?
미국과 중국처럼 규모의 경쟁에 뛰어들기보다는, 한국만의 차별화된 전략적 정체성, 즉 신뢰할 수 있는 AI 파트너라는 입지를 구축해야 한다.
한국은 이미 전 세계적으로 K-팝, 드라마, 영화, 웹툰, 음식 등을 통해 신뢰받는 문화 강국으로 자리매김했다. 이러한 문화적 친밀성과 윤리적 이미지, 그리고 공동체 중심의 가치관은 AI와 결합할 때 강력한 경쟁력이 된다.
기술력에 윤리, 투명성, 포용성이라는 가치를 더한 한국형 AI는 글로벌 시장에서 환영받을 수 있다. 이는 단순한 기술 수출이 아니라, 사람 중심의 기술을 세계에 제안하는 새로운 소프트파워가 된다.
우리의 노래와 이야기, 감성과 감정은 국경을 넘어 마음에 스며들고 있다.
그렇게 우리는 전 세계에 친근하고 믿을 수 있는 나라로 기억되고 있다. 이제 그 문화의 뿌리를, AI라는 새로운 기술에도 심을 때이다.
무섭고 거대한 기술이 아니라, 사람을 위한 기술, 함께 나누는 기술, 그리고 윤리와 배려를 담은 '따뜻한 기술이 되어야 한다.
지금 세계는 소버린 AI(Sovereign AI)를 준비하고 있다.
이는 각 국가의 언어, 문화, 가치관을 반영한 자국 맞춤형 AI 모델을 지칭한다. 글로벌 플랫폼 기업들의 AI가 특정 국가의 관점만을 반영하는 것을 경계하고, 각국의 정체성을 담은 AI를 구축하자는 흐름이다.
한국은 이 전환점에서 윤리적이고 신뢰할 수 있는 AI 파트너로서 협력국과의 연대를 강화하고, AI 생태계의 다양성과 균형을 지키는 중요한 축이 될 수 있다.
이는 단지 기술 문제가 아니라, 국제사회에서의 가치 외교와 디지털 민주주의의 실현이라는 정치적 의미도 함께 지닌다.
하지만 국내 현실은 아직 한 걸음 뒤처져 있다.
네이버가 최근 16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응답자의 57%가 생성형 AI를 사용해본 적이 없거나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고 응답했다.
특히 성별, 연령, 지역 간 격차도 크다. 이는 AI가 일상으로 스며들기에는 아직 접근성과 이해도가 부족하다는 신호다. 기술 발전은 빠른데, 국민 체감은 낮다.
디지털 포용은 선택이 아닌 생존 조건이며, 모두를 위한 AI 생태계 조성없이는 기술주권 또한 허상에 불과하다.
정부는 AI에 대한 공공교육과 인프라 확충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하며, 기업은 일상에서 체감할 수 있는 서비스 중심의 AI를 만들어야 한다.
기술은 일부 전문가의 것이 아니라, 국민 모두가 체감하고 활용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의미를 갖는다.
이제는 민관, 학계와 시민사회가 원팀이 되어야 할 때다.
정부는 규제와 진흥의 균형을 갖춘 정책으로 기업을 뒷받침하고, 기업은 글로벌 수준의 기술 경쟁력을 갖추는 동시에 윤리적 설계와 투명성 확보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시민사회는 AI의 감시자이자 참여자로, 공공성과 책임을 요구하는 목소리를 지속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신뢰할 수 있는 AI라는 메시지를 세계에 전하는 한국형 정체성의 확립이 시급하다.
AI는 단지 기술의 진보가 아니라, 인류의 삶을 다시 정의하는 전환점이다.
따라서 우리는 기술의 속도보다는, 기술이 어떤 가치를 담고 누구를 향하고 있는지에 주목해야 한다.
한국은 기술의 선진국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사람 중심의 기술 국가가 되는 것이다.
그것이 한국이 이 AI 패권 경쟁 시대에 기여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소프트파워이자, 한국만이 할 수 있는 전략적 기여이다.
그렇게 우리 한국은, 미국도 중국도 따라오지 못하는 사람의 마음을 아는 기술을 세상에 보여줄 수 있다.
K-컬처의 진정성이 AI와 만날 때, 한국은 단순한 기술 강국이 아니라 소프트파워의 진짜 중심국가로 떠오를 수 있다.
■ 박순장 前 소비자주권시민회의 사무처장(AI소비자 전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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