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에 의한 재난이 발생할 때마다 회자되는 것이 하인리히법칙이다. 수많은 사고 통계를 접했던 하인리히는 산업재해 사례분석을 통해 하나의 통계적 법칙을 발견했다.

산업재해가 발생해 중상자가 1명 나오면, 그 전에 같은 원인으로 발생한 경상자가 29명이고 부상당할 뻔한 잠재적 부상자가 300명 있다는 통계적 사실이다.

그래서 그가 제창한 법칙을 <1:29:300법칙>이라고도 한다. 큰 재해와 작은 재해, 사소한 사고의 발생 비율이 <1:29:300>이라는 뜻이다.

필자는 하인리히가 발견한 법칙에서 300이라는 숫자에 늘 주목해 왔다. 300이라는 숫자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지만, 그러한 일이 발생할 가능성이 있다고 예측 가능성을 암시해주는 숫자이기 때문이다.

대중매체에서 재난에 관한 보도기사를 접할 때마다 사람들은 그 현상이 나타난 일에 대해서만 주로 언급한다. 그 이전에 그 재난을 대비할 수 있었던 시간과 여건이 있었다는 것에 대해서는 대체적으로 침묵하거나 관심을 두지 않는다.

안전사회를 위해 이제 생각의 전환이 필요하다. 하이데거(Heidegger)는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했다. 그의 말에 따라 '안전한 사회' 혹은 '안전사회'에 대한 언급이 나올 때마다, 먼저 '우리에게 이에 대한 정의가 제대로 뿌리내려 있는지'를 물어야 한다.

우리에게 안전사회는 어떤 사회인가. 미디어를 장식하는 겉으로 드러난 가시적인 사고율이 그다지 높지 않는 사회만을 안전한 사회라고 하지는 않을 것이다.

▲정이신 아나돗학교 대표간사·아나돗공동체 위임목사
▲정이신 아나돗학교 대표간사·아나돗공동체 위임목사

안전사회란 앞으로 벌어질 일에 대한 예측 가능성이 높은 사회이다. 자연재해 등 우리가 예측할 수 없는 각종 재난이 있다. 그런 재난이 발생했을 때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한 대비책을 세워 발 빠르게 복구를 진행할 수 있는 사회가 안전사회이다.

사회 시스템이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아 조그마한 재난이 발생해도 복구가 언제 될 것인지 예측하기 힘든 사회를 안전사회라고 부르지 않는다.

안전하지 않은 사회를 우리의 아이들에게 물려주고자 하는 이는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안전사회를 위해 우리가 가진 안전에 대한 의식들을 되돌아 봐야 한다.

한반도에서 살아간다는 것에 대한 지정학적 운명은 어쩔 수 없지만, 이것이 브레이크가 고장 난 차를 운전하는 것처럼 된 사회는 결코 안전한 사회가 아니다. 따라서 우리가 쓰는 언어적 행위 속에 안전에 대한 정의가 어떻게 규정돼 있는지 살펴봐야 한다.

먼저 안전사회가 되기 위해서는 재난 대비 행동이 일상화돼야 한다. 재난이 일어난 후 그에 대한 복구를 말하기 이전에, 재난으로 발생할 수 있는 갖가지 지표를 측정해서 대비할 수 있는 범위를 넓혀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안전사회가 피상적인 언설로만 떠돌게 된다.

예를 들어 치안이 제대로 유지되는 것은 안전사회의 첫걸음이다. 그러나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더 이상 눈에 보이는 치안만을 안전사회의 기준으로 요구하지 않는다.

일상에서 벌어지는 갖가지 일에도 예측 가능한 영역에 대해 철저한 대비가 필요하다. 재난에 대한 구체적인 대비도 없이 무조건 안전사회만을 구호로 외치는 일은 모래 위에 집을 짓는 일이다.

사람들이 눈여겨보고 화제로 삼는 1이나 29가 아니라 제대로 감지하고 못하고 있는 300이라는 숫자에 주목해, 우리 사회에 나타날 수 있는 재난에 대한 예측 가능성을 높여야 한다. 이를 위해 일상에서 안전을 도모하는 언행을 의식적으로 확인해야 한다.

새벽과 저녁으로 가을바람이 불기 시작하고 있다. 한강변에 혹은 집주변의 자전거 산책 도로에서 자전거를 탈 때는 꼭 안전모를 착용하는 것이 좋다.

굳이 하인리히법칙을 시험해 보겠다고 억지 용기를 부려 안전모를 착용하지 않고 바람을 쐬려하다가는 1이나 29에 해당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예측 가능성을 높이는 행동이 안전의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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