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 메시아 그거 아무나 할 수 있어! 형도 메시아 할 수 있어." 한국의 모 이단 교주가 했다는 이야기다. 모 방송국에서 교주가 저지른 성폭행의 진실을 파헤치는 고발 프로그램을 방영하자, 제자들을 내팽개쳐 두고 외국의 모처로 도망갔던 자였다. 이는 이단 교주에게 저의 형이 남몰래 찾아가자 했던 말이다.

이 말을 한국 사회에 전하면서, '동생이 순진해서 이상한 무리에게 속아 메시아라고 했다'고, '물의를 일으켜 죄송하다'고 했던 이는 저의 형이었다. 그런데 저의 형은 이 발언이 여럿에게 전해진 후 갑자기 말을 바꿨다. 그 대가로 둘 사이에 무슨 거래가 있었는지 아무도 모른다.

사람이 갑자기 말을 바꿀 때는 반드시 이유가 있다. 자신의 동생에게 불리한 증언을 한 후 아무런 이유도 없이 그 말을 바꾸지 않는다. 대체 누가 거짓말을 한 것인지, 둘만 주고받은 이야기인지라 더 이상 캐 물을 수도 없다.

자신이 지켜야 할 정체성이 흐려졌는데도 엉뚱한 주장을 펼치는 저들이 이단 교주들이다. 내가 지녀야 할 정체성은 이것도 되고 저것도 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이 지녀야 할 정체성은 기본적으로 배타적이다. 법적으로 부부관계를 정리하지 않았는데, 내가 이 사람의 배우자이면서 동시에 저 사람의 남편이나 아내가 될 수는 없다.

이것을 나와 다른 정체성을 지닌 사람들을 포옹하는 관용의 정신과 혼동하면 안 된다. 나는 미국인도 되고 한국인도 되며, 아프리카 사람, 북한 인민도 되고 나아가 지구인도 된다고 하면서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혐오에 가까운 배타성을 보이는 것은 성경적이지 않다. 신앙인이 지녀야 할 종교인으로서의 정체성에 대해서는 확정된 범위가 있어야 한다.

▲정이신 아나돗학교 대표간사ㆍ아나돗공동체 위임목사
▲정이신 아나돗학교 대표간사ㆍ아나돗공동체 위임목사

이단 교주들은 자신들의 사회·종교적 정체를 수시로 바꾸는데, 갑자기 바뀌는 저들의 진짜 정체가 뭔지 도무지 알 수 없다. 또 교주들이 이렇게 하는데도 정작 저들의 추종자들은 자신들이 속고 있는 교주의 정체에 대해 새로운 인봉이 떼어졌다고 희희낙락이다. 저들은 '이단 교주의 정체가 구원의 새로운 비밀'이라고 한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로 신비체험을 아주 많이 했다고 수시로 자랑했던 모교주는 성폭행의 진실 여부를 가리는 법정에서 '꿈꾼 것이 신비체험'이라고 말을 바꿨고, '자신은 절대 죽지 않을, 영생할 몸을 지녔다'고 주장했던 모교주는 교도소에서 죽었다. 교주들의 정체는 늘 이렇게 자신들의 편의에 따라 괴이하게 바뀐다. 그래서 이단들이 주장하는 구원의 비밀도 늘 바뀐다.

정체성을 바로 세우기 위한 선택에는 책임이 따르는 법이기에, 우선 선택한 것을 아름답게 가꿔가야 한다. 자신의 정체성을 확보할 수 있는 선택의 자유를 어떻게 하면 더 효과적으로 사용할 수 있을지 여러 날 생각해야 한다. 그런데 이때 자신의 사회·종교적 정체를 알 수 없는 이유로 바꾸며 거짓말하는 이단 교주들의 만행은 우리의 선택에 혼선을 불러일으키고, 우리가 누려야 할 자유를 가로막는다.

인간이 사회를 이뤄 살아가면서 기억해야 하는 것은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해 주는 자존감이다. 이것이 없으면 자신의 정체성을 토대로 시행했던 특정한 선택에 대해 반격이 들어올 경우, 좋은 것인데도 불구하고 '이게 아닌가 보네'라고 생각해 길을 바꾸다가 손해를 입는다. 그런데 이단 교주들의 치사한 변신에는 이런 자존감이 아예 보이지 않는다.

신앙인으로서 자존감은 자신의 구원론을 어떻게 서술하고 있는가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 전 우주적인 관점과 구원사적인 측면에서 나의 행위가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신앙인은 늘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사회생활을 하면서 이 일을 하는 것이 나의 구원, 하나님 나라의 확장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같이 생각해야 한다. 이런 면이 전혀 없는 이단 교주들의 치사한 변신으로 인한 사회·종교적 피해를 언제까지 그대로 지켜봐야 하는지 마음이 참 무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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