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호주의 장애인 예술단체 백투백시어터의 공연 '사냥꾼의 먹이가 된 그림자' 중 한장면. ⓒ 모두예술극장
▲ 호주의 장애인 예술단체 백투백시어터의 공연 '사냥꾼의 먹이가 된 그림자' 중 한장면. ⓒ 모두예술극장

얼마 전 왼쪽 손 엄지손가락에 타박상을 입어 엄지손가락을 한달동안 못쓰게 되는 일이 있었다.

엄지손가락 하나 못쓰게 된다 해서 무슨 일이 있을까 했는데 오른손잡이인 필자가 왼손 엄지 손가락하나 못쓰게 되면서 느끼는 불편함은 생각보다 컸다. 

설거지를 하는 행위에서도 접시를 들고 비누칠을 해서 물로 헹구는 행위가 이렇게 까지 힘든 일이 었던가. 그 행위에서 엄지손가락의 필요성은 막중했다.

그 손가락이 다 나을 때까지 그 한 달간 느낀 신체적 박탈감은 생각보다 컸다. 왜 두 손이 필요한 것인지, 건강하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것인지 그때에나 깨달았던 것 같다. 

얼마 전 구세군빌딩 아트홀을 장애예술인 표준공연장으로 전면 개보수해 '모두예술극장'이 개관했다.

이곳은 장애 예술가들의 창작, 육성, 교류활동을 위해 조성된 국내 첫 '장애 예술 공연장'이다. 장애 예술가들의 전문성을 증진하고 우수한 작품을 창작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한 문화예술 공연장으로서 장애인의 예술 접근성 향상에 공공적 역할을 해줄 것으로 사료된다. 

그 곳의 첫 공연 21°11′을 관람했다. 이 공연의 안무에서 무용이 오랫동안 추구해온 완전한 균형이 아닌 '불균형'이 만들어낸 새로운 균형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뇌변병 장애를 가진 사람의 움직임은 비장애인의 움직임과 다른 움직임의 질감과 균형점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장애로 인한 근육의 경직이 독특한 움직임을 발생시키고 중심축이 휘어진 몸은 복잡한 균형점을 만들어 낸다고 한다.

그러한 의미에서 공연 초입에는 장애와 비장애인의 경계가 보였으나 공연이 끝날 때쯤은 장애의 경계를 알아볼 수 없었다. 그래서 일까 이 공연을 통하여 필자는 형용할 수 없는 무한한 자유감을 느꼈다. 

이를 통해 장애인이라는 단어는 우리가 만들어 놓은 비뚤어진 관점과 시각이 만들어 놓은 잘 못 해석되어진 단어가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소위 말하는 장애인이라는 단어는 비장애인들의 수적 우세의 시각과 관점에서 만들어낸 정량화된 단어일지 모른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이라는 단어에서 풍기는 이 이질적 감정과 냄새는 어쩌면 비장애인의 수적 우세의 시각과 관점으로 정량화해 만들어진 허상 같은 단어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떨쳐 버릴 수가 없다.

세상과 타협하지 못한 우리의 삐뚤어진 생각과 나와 다른 사람은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편협하고 오만한 관점으로 정량화한 이 잣대는 장애인과 비장애인이라는 2분법적 단어를 만들어내 비인간화하는 위계를 존속하는지도 모르겠다.

우리도 언어를 모르는 타국을 여행하게 되면 언어장애인이 되기도 하고, 다리가 부러져서 휠체어나 목발을 짚는 일시적 장애인이 될 수도 있다. 장애라는 것은 언제든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연유로 우리는 장애인들을 비장애인과 구별할 것이 아니라 이러한 이분법적 문화를 사회적 포용으로 무장하여 누구에게나 극복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문화를 만들어 나가야 할 것이다.

장애가 있든 장애가 없든 모두에게 동등하고 균일한 많은 기회들이 주어지는 것이 중요할 것이며 이러한 사회적 문화가 포용적 무장인 것이다. 

장애는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것이라는 것을 우리가 함께 공감할 수 있어야 한다. 어쩌면 정신적 장애는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현대인 이라면 하나씩은 가지고 있는 문제일 수도 있겠다.

장애인을 배려한다는 포용적 태도는 그들을 동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극복할 수 있는 많은 기회를 비장애인과 동등하게 제공하고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동등한 기회 속에서 화합하고 성장하는 게 아닐까 싶다.

사람들을 비인간화하는 위계를 존속시키는 데에 우리는 지금 동조하고 있지는 않은지에 대해 고찰하고 그러한 상황을 충분히 두려워하고 또 성찰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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