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이신 논설위원·목사
▲ 정이신 논설위원·목사

서울 소재의 대학교에 다녔던 고등학교 동기가 시국사건에 휘말려 제적당했습니다. 그 뒤 목사가 되기를 희망하면서 신학대학교에 갔으나, 그를 짓눌렀던 여러 가지 사연으로 인해 거기도 졸업하지 못하고, 노동 현장에서 생계를 이어갔습니다.

고향으로 내려가 살았던 그는 술을 한 잔 걸치면, 지게차를 운전했던 자신을 '노가다대학 지게학과'를 졸업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고향에서도 통일운동에 관한 열정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몸에 스며들어 있던 고문 후유증은 그를 다른 동기보다 더 빨리 하늘나라로 불러들이는 호루라기가 됐습니다.

그가 타도의 대상으로 생각해, 알리고자 했던 메시지를 사회의 여러 사람에게 말하는 수단으로 생각하고 들어갔던 건물은, 지금도 서울의 모처에 있습니다. 또 젊었던 그의 몸에 고문 후유증이란 상처를 남긴 기관도 여전히 건재합니다. 그런데 저들이 그에게 적용한 법의 유권해석에 관한 기록을, 현재는 법과 연관된 학과에서 권력에 눌려 법을 잘못 적용한 사례로 공공연하게 교재로 사용합니다.

저들은 그에게 적용할 수 없는 법률 조항을 억지로 끌어다가 그를 수인(囚人)으로 만들었지만, 시간의 정의를 통해 반전이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시간의 정의는 그에게도 일정한 몫을 요구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땅속으로 들어갔고, 그의 목소리에는 이제 메아리가 없습니다.

법률 조항을 엉터리로 적용했던 저들과 권력이 두려워 피의자에게 고문까지 해가며 죄를 만들었던 세력에 대해 이제 많은 이들이 비판적인 말을 합니다. 그런데 제가 목사가 되고 보니, 그가 잠시나마 꿈꿨던 목회자란 소망을 접고 낙향한 게 더 마음이 아픕니다.

그와 저는 고등학교에 다닐 때도 서로 얼굴을 마주 대할 기회가 많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공공기관에서 풀려나 다녔던 대학교에서 제적당한 후, 그의 아버지가 보여준 길을 따라 목회자가 돼보겠다고 신학대학교를 찾아갔던 그의 얼굴이, 부고를 접하면서 자꾸 생각났습니다.

저는 한동안 목사가 되는 걸 하나님이 저더러 세상을 바꾸라고 하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목사가 되면 세상이 조금 바뀔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탁류가 그리 쉽게, 저 하나로 인해 바뀔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게 얼마나 어리석었던 일인가요. 제게 목사가 되라고 하신 건 세상을 바꾸라고 한 게 아니라, 저만큼이라도 해 아래 세상에서 인간답게 살아보라고 주신 일입니다.

이 일을 하면서 배운 게 있습니다. 인간이 흙을 모르면 교만해집니다. 하나님이 주신 흙을 알아야 인간의 힘만으로 되지 않는 자연이 있다는 걸 알고 겸손해집니다. 또 흙으로 대변되는 자연의 섭리를 존중하고, 자연이 살아 숨 쉬는 생명체라는 걸 인정한 후, 이들과 같이 살려고 노력하는 태도를 보입니다.

이와 달리 권력이 만든 제국에는 사람에게 필요한 물건이 거의 다 있기에, 제국은 철저하게 사람 위주의 사회가 됩니다. 모든 게 권력 중심으로 운영되기에 권력의 대상인 사람의 책임이 우선이고, 당연히 사람이 모든 걸 다 해내야 합니다. 이때 사람들은 제국이 만든 문명을 동경하고, 권력자가 만든 제국에 아끼지 않고 찬사를 보냅니다. 제국을 하나님을 대신한 환락과 기회의 신이라고 숭배까지 합니다.

제국은 저들의 주요 부분을 세운 권력자들을 위대하다고 칭송하게 만들고, 그런 장치를 통해 그 안에서 사는 사람들에게 최면을 겁니다. 제국을 일군 사람들의 권력에 취하게 만들어 하나님의 능력을 보지 못하게 합니다. 가뭄이 들어도 댐에 저장해 둔 물을 보며, 갈라진 땅보다 갈급함을 더 천천히 느끼라고 합니다. 그런데 자연에 있는 희망이 인간에게 없는 세상은 하나님 나라의 모습이 아니기에, 자연이 준 희망을 인간이 보지 못하면 안 됩니다.

그 동기가 봤던 희망이 무엇이었든 그는 이제 우리 곁에 없습니다. 한 줌의 재가 돼 하늘로 돌아간 그에게 하나님이 주신 흙의 안식이 깃들기를 기도합니다.

■ 정이신 논설위원·목사 △한양대 전기공학과 졸업 △백석대 신학대학원 졸업 △아나돗학교 대표간사 △아나돗공동체 위임목사 △세이프타임즈에 '노희(路戱)와 더불어 책(冊)놀이' 연재, 칼럼집 <아나돗편지(같이 비를 맞고 걸어야 평화가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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