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이신 논설위원·목사
▲ 정이신 논설위원·목사

뿌리는 식물에만 있는 게 아니라 동물에도 있습니다. 그런데 동물의 뿌리는 쉽게 보이지 않습니다. 식물처럼 뿌리를 제 몸에 붙이고 사는 게 아니고 대부분 따로 놀며 살기에, 동물의 뿌리는 그가 직접 밝히거나 DNA를 확인하기 전에는 알기 힘듭니다.

또 동물 중에도 뿌리를 알 수 있는 건 인간으로 국한된 경우가 많습니다. 야생의 동물이 가진 뿌리를 찾아내는 건 하늘의 별 따기만큼 어렵습니다. 인간 세상처럼 내 뿌리가 누구라고 말하거나, 족보 등을 통해 자신의 조상에 관한 기록을 가진 종이어야 뿌리에 얽힌 이야기를 할 수 있습니다.

한국 사회에서 인간의 뿌리에 관한 연구가 천덕꾸러기가 된 적이 있습니다. 보학(譜學)이란 이름으로 그들이 누릴 수 있는 기득권을 옹호하기 위한 수단이 된 채, 바람직하지 않은 권력을 누리려는 증표로 한동안 오용됐었습니다. 내 뿌리를 아는 건 시작과 끝을 마음에 담고 조상의 은덕을 헤아리며 겸손하게 살기 위함인데, 이게 사라진 보학은 '신라 화랑의 몇십 대 후손'이란 기이한 방정식을 만들어냈었습니다.

해 아래 세상에서 뿌리 없는 생명은 없습니다. 그리고 뿌리의 시각으로 보면, 인간은 내던져졌거나 누군가의 실수로 이 땅에 온 게 아닙니다. 그러므로 뿌리를 몸에 달고 살지 않고 독립채산제로 살아도, 뿌리에 관한 생각은 몸과 마음에 담아둬야 합니다.

해 아래 세상에는 부모님처럼 드러나 보이는 뿌리도 있지만, 보이지 않게 내 뿌리가 돼 준 사연이 있습니다. 이게 뭔지 찾아보면서 사는 것과 무시한 채 사는 건 다릅니다. 뿌리를 아는 인간으로 살기 위해서 나를 이 땅으로 부른 사연을 마음에 새겨둬야 합니다.

제게도 제 몸의 뿌리인 부모님이 부과해준 과업이 있습니다. 그게 담긴 게 제 몸의 DNA입니다. 이걸 무시한 채 살 수 없습니다. 제 몸이 가진 DNA를 되새기면서, 그중에 약한 부분은 덧대고 가꾸며 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이걸 무시하고 지내면, 몸이 감당할 수 없는 DNA의 역풍이 불어와 온갖 병을 친구로 삼는 고생을 하게 됩니다.

몸의 뿌리를 잘 모르면 자기에게 주어진 분량만큼 자랄 수 없습니다. 높이 올라가야 하는 몸이 있고, 옆으로 퍼뜨려야 하는 몸이 있습니다. 두 몸이 같지 않으니, 뿌리가 다른 둘에게 같은 인생의 길을 만들라고 하면 안 됩니다. 또 같이 얽혀서 살아야 하는 이가 있습니다. 이걸 무시하고 모두 높아지라고, 옆으로 퍼뜨리는 친구를 만들지 말라고 강요하는 건 뿌리를 무시한 것입니다. 이렇게 뿌리를 무시하면 역풍이 불어 고달파집니다.

옆으로 퍼뜨리는 일을 했을 때 아름다워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마저 위로 올라가야 한다고 내몰면 사회가 풍요로워지지 않고 불안해집니다. 먼저는 내가 지닌 뿌리의 특성대로 살아야 합니다. 무작정 높이 올라가야 한다고 주장했던 저들이 남긴 패착의 교훈은 역사가 알려주고 있으니 그걸 반복하면 안 됩니다.

성경은 영혼에도 뿌리가 있다고 합니다. 뇌과학이 발달한 후 마음의 생성이 뇌의 작용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만, 마음을 움직이는 영혼의 DNA는 뇌의 작용과 다릅니다. 그래서 영혼의 DNA를 몸과 마음에 새기는 일은 우주의 뿌리를 찾는 사건이 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몸의 뿌리와 더불어 인간의 영혼에 있는 뿌리를 기억하는 일은 물에서 헤엄치는 게 아니라, 늪지에서 온갖 생물과 더불어 지내는 것과 비슷합니다. 물에 들어가 헤엄만 치고 나오면 잘 모릅니다, 물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가는 다양한 존재를. 마찬가지로 몸의 기억만 가지고 살면 잘 모릅니다, 영혼에 뿌리를 둔 채 내 마음에 얽혀 있는 많은 이야기를.

영혼에 뿌리를 둔 이야기는 몸과 마음이 지닌 사연 안에 꼭꼭 숨어 있습니다. 이걸 찾아내 삶에 아로새긴 후, 이게 제시하는 길로 가야 합니다. 그래야 해 아래 세상에서 채워야 할 과업을 행복하게 수행하며, 거룩한 길을 자유롭게 갈 수 있습니다.

■정이신 논설위원·목사 △한양대 전기공학과 졸업 △백석대 신학대학원 졸업 △아나돗학교 대표간사 △아나돗공동체 위임목사 △세이프타임즈에 '노희(路戱)와 더불어 책(冊)놀이' 연재, 칼럼집 <아나돗편지(같이 비를 맞고 걸어야 평화가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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