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이신 논설위원·목사
▲ 정이신 논설위원·목사

내일부터 설 연휴가 시작됩니다. 어릴 적에는 양력 1월 1일이 설이라고 해서, 사흘간 연휴를 뜻하는 빨간 글자가 달력에 쓰여 있었습니다. 또 텔레비전에서 새해 설 특집 방송이라고 하면서, 한복을 차려입은 사람들이 나와서 여러 가지 이벤트를 벌였습니다. 그러나 이건 텔레비전에 나온 이야기였고, 집안이나 마을에선 아무런 반응이 없었습니다. 어려서 음력을 잘 몰랐던 저는 텔레비전에서 말하는 설이 왜 이렇게 조용한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로부터 얼마 동안의 시간이 지나면, 집안과 마을이 바빠지기 시작했습니다. 엄마는 장에서 식자재를 사다가 음식을 장만했고, 동네 형들은 자기들끼리 뭔가를 만들었습니다. 어떤 때는 엄마가 시장에 저를 데리고 가서 옷을 사주기도 했는데, 그 옷은 반드시 정한 날이 됐을 때 입어야 했습니다. 만약 그날이 되기 전에 그 옷을 몰래 꺼내 입었다가는 엄마에게 호되게 꾸지람을 들었습니다.

설의 날짜는 늘 같지 않았습니다. 어떨 때는 겨울방학에 찾아 왔지만, 어떨 때는 겨울방학이 끝난 후, 그 학년을 매듭짓는 어수선한 분위기에 이날이 찾아 왔습니다. 그래서 신년 달력을 받으면 그해에 설이 언제 오는지 살폈지만, 양력 1월 1일과 연관된 연휴만 빨간색으로 쓰여 있었습니다. 저와 달리 어른들은 달력에 빨간 글자로 쓰여있지 않았던 설을 아주 잘 찾아냈습니다.

설이 공휴일로 지정된 후 이곳저곳을 살펴보니, 지향하는 세계관과 삶의 환경 때문에 입춘이나 춘분 이후가 새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내친김에 사람들에게 새해에서 첫날이 언제인지 물어봤습니다. 생일을 첫날로 보는 사람은 자기가 태어난 날을 첫날로 삼고 있기에 자기 주도적인 사람이고, 양력 1월 1일을 첫날로 여기는 사람은 사회적 분위기를 중요시했습니다. 공휴일로 지정한 설이 있지만, 사회적 분위기는 조금 다르기 때문입니다.

교회력에선 대강절을 새해의 첫날로 여기는데, 이날은 양력으로 11월 말이나 12월 초입니다. 사회에서 쓰는 역법과 다르지만, 예수님의 강림을 기다리며 사는 게 기독교 신앙이기에 교회력은 이날을 새해의 첫날로 여깁니다. 기독교는 성탄절 4주 전인 대강절 때부터 초 네 개를 강대상 위에 올려놓고, 매주 마다 하나씩 켜면서 성탄절까지 예수님의 탄생을 기다리는 신앙의 마음을 표현합니다.

기독교에서 예수님의 강림을 기다리는 건 아주 좋은 일입니다. 이는 내가 주인이 아니라는 고백이 있어야 가능하기에, 이 기다림을 신앙의 지표와 연결하기도 합니다. 내가 주인이라면 굳이 누구를 기다릴 필요가 없습니다. 주인이 누굴 기다립니까. 주인이니 자기가 정한 대로, 마음 가는 대로 살면 됩니다. 혹 자기가 주인인지 모르고 있었으면, 내가 왜 주인인지를 깨닫고 그때부터 주인답게 살면 됩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제가 볼펜을 하나 샀습니다. 그럼 저는 볼펜의 주인이 됐기에 제 마음대로 볼펜을 쓰다가, 다 쓰고 나서 버리면 됩니다. 볼펜은 제가 만든 게 아닙니다. 그러나 제가 값을 치르고 샀기에 제 소유가 됐고, 그때부터는 제 마음대로 쓰고 버리면 됩니다.

이와 달리 직접 길러서 주인이 되는 사례도 있습니다. 땅에 묘목을 심어 그것을 기르거나 씨앗을 뿌려 채소를 재배했다면, 그건 제가 기르고 가꾼 것이기에 제 것입니다. 자연의 도움을 받았지만, 노동력을 제공하고 가꿨기에 제가 주인이 됐습니다.

그런데 사회적 동물인 인간은 자기를 스스로 만들지 못했습니다. 사람은 위에서 말한 것 가운데 어느 조건도 완벽하게 충족시킨 게 없습니다. 그래서 내가 꾸리고 가꿔가는 삶이지만, 온전히 내가 주인이 아닙니다. 성경은 인간에게 주어진 삶이지만, 인간이 주인이 아닌 역설이 해 아래 세상에 존재한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인은 그분이 내게 맡긴 일이 무엇이고, 그것에 따라 내가 이 땅에서 해야 하는 일이 무엇인지 새해에서 첫날이 됐을 때 꼭 살펴야 합니다.

■정이신 논설위원·목사 △한양대 전기공학과 졸업 △백석대 신학대학원 졸업 △아나돗학교 대표간사 △아나돗공동체 위임목사 △세이프타임즈에 '노희(路戱)와 더불어 책(冊)놀이' 연재, 칼럼집 <아나돗편지(같이 비를 맞고 걸어야 평화가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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