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의 이슈분석 <33>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오는 슬럼프는 불청객이다.

브라질 리우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골프의 박인비 선수도 미국의 수영황제 마이클 펠프스도 한때는 지독한 슬럼프에 시달렸다.

사전적 정의는 '경기침체'나 '운동선수의 부진상태'을 의미하지만 오늘날 우리의 일상 어디에서나 통용될 만큼 폭넓게 사용되고 있다.

슬럼프가 오면 이유없이 화가 나고 짜증이 난다. 모든 것이 귀찮고 의욕도 사라진다. 건망증이나 불면증으로 잠 못 이루는 밤도 늘어간다. 어디론지 훌쩍 떠나버리고 싶은 충동도 생긴다. 심하면 우울증으로 고통을 받을 수도 있다.

지난해 한 취업포털 사이트가 1337명의 직장인을 대상으로 조사한 자료를 보면 85% 이상이 "슬럼프를 경험했다"고 한다. 사람마다 차이는 있지만 보통 3년마다 찾아온다고 해서 슬럼프의 '3-6-9' 법칙이라고도 한다.

그 원인은 낮은 급여, 잦은 야근 등의 피로누적, 동료와의 관계, 반복적인 업무에서 오는 권태감, 불확실한 미래, 승진탈락과 같은 좌절감, 건강이상 등을 꼽을 수 있다.

일반인과는 달리 소방관에게는 훨씬 심각한 원인이 도사리고 있다. 충격적인 사고현장을 반복적으로 목격하는데 따른 외상 후 스트레스장애(PTSD), 주취자의 폭언과 폭행, 순직한 동료 소방관에 대한 죄책감, 불규칙적인 식사와 수면,  질병과 부상, 남성 중심 조직에서 일해야 하는 여성 소방공무원의 스트레스, 계급제에서 기인한 소통 부재 등이 있다.

소방관의 슬럼프는 일반인에 비해 그 강도가 훨씬 더 심하고 주기가 짧은 것이 특징이다.

슬럼프를 오랜 기간 방치하게 되면 현장에서 사고로 연결될 개연성이 크다는 점에서 효과적인 대책 마련이 필요하다.

소방관의 업무 그 자체는 스트레스의 연속이다. 아무리 체력이 강한 소방관이라고 해도 한계점은 분명히 존재한다. 사명감이나 명예라는 가치로도 극복하기 힘든 극한 상황은 얼마든지 올 수 있다.

슬럼프는 조기에 예방하는 것이 중요하다. 평상시 전문가의 진단과 조언을 통해 지혜롭게 극복해 나간다면 보람된 직장 생활을 영위할 수 있다. 궁극적으로는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다.

소방관의 슬럼프를 예방하기 위한 정부 노력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이미 많은 소방서에 힐링룸, 휴식이 있는 휴(休)캠프, 정신상담 서비스 등도 마련돼 있다. 

하지만 일선 소방관의 말을 빌리면 많은 정책들이 일회성이거나 전시성 행정인 경우가 많아 슬럼프 근본 원인이나 치료에는 부족하다는데 의견을 같이한다.

전문가 역시 슬럼프는 한 번의 노력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고 입을 모은다. 충분한 휴식과 건강관리, 자원봉사와 같은 나눔을 통해 삶의 보람을 찾는 일, PTSD와 같은 직업병에는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대처하는 것, 그리고 자기 느낌과 자기 감각에 보다 더 충실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한다.

소방분야에 있어서 자타 공인 세계 최고라고 하는 미국에서도 최근 정신적인 문제로 자살하는 소방관이 증가하고 있다고 한다. 이로 인해 발생하는 근무의욕 저하, 간접비용 손실 역시 만만치 않다.

"소방관이 건강해야 지역사회가 안전하다"는 말은 그냥 듣기 좋자고 외치는 구호가 되서는 안 된다.

우리사회는 아직도 '소방관이 왜 아픈지, 또 어떻게 하면 문제를 사전에 예방할 수 있는지'에 대한 연구가 많이 부족한 실정이다.

사고가 발생하면 외형적인 치료에만 집중하다보니 정말 중요한 문제들은 간과하고 있다. 이렇게 해서는 대한민국 안전을 든든하게 받치고 있는 소방이라는 기둥이 흔들릴 수밖에 없다.

역설적으로 슬럼프는 무언가 해결해야 하는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절호의 기회다. 슬럼프라는 신호를 잘 파악해서 대처하면 조직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 시킬 수 있다.

재난현장에 출동하는 소방관들에게는 고도의 집중력과 자신감이 필요하다. 슬럼프를 잘 극복해 금메달을 딴 박인비나 펠프스 선수처럼, 소방관 또한 슬럼프를 잘 극복해서 안전분야에서 금메달을 딸 수 있도록 정부는 세심하게 챙겨야 한다.

이건 세이프타임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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