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순장 칼럼] 국정자원 화재, 국가안보·디지털 강국 붕괴시킨 '인재'

2025-10-04     박순장 칼럼니스트
▲ 국가정보자원관리원 화재로 인해 불에 탄 리튬이온 배터리가 소화주소에 담겨 있다. ⓒ 연합뉴스

국가정보자원관리원(국정자원) 대전 본원에서 발발한 화재는 단순한 전산 사고가 아니다. 국가 안보와 디지털 정부 신뢰를 붕괴시킨 예고된 인재(人災)였다.

647개에 달하는 정부 시스템이 동시에 마비되고 96개 서버 장비가 전소되는 치명적인 손상은 대한민국이 그동안 자랑해 온 '디지털 강국'의 민낯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더 큰 문제는 이 사고가 피할 수 없는 재해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2022년 카카오 먹통 사태와 2023년 행정전산망 마비라는 두 차례의 명확한 경고가 있었음에도 불구, 정부는 3년 가까이 위험을 방치하는 직무유기를 범했다.

대가는 고스란히 국민의 불편과 불안으로 귀결됐다. 두 차례의 대형 사고 직후 정부 관계자들은 "화재나 지진으로 소실되어도 3시간 내 복구 가능하다"고 자신있게 호언장담했다.

"정부 전산망은 카카오와 다르다"며 국민을 안심시켰지만 공허한 말장난에 불과했다.

핵심적인 클라우드 재난복구(DR) 시스템은 화재가 발생한 2025년 시점까지도 구축되지 않았다. 2012년에 착수된 DR 전용 센터 건립 계획은 13년 이상 지연됐다.

정부는 필요성을 인지하고 전문가들의 경고를 청취했음에도 불구, 실행은 미루고 또 미루었다.

서버 단위의 백업은 존재했지만 데이터센터 전체가 마비되는 상황에는 속수무책인 '개별 나무는 보호하면서 숲은 방치한 격'이었다. 국가 핵심 인프라의 재난 대비를 수년 동안 미룬 것은 무책임의 극치라 할 수 있다.

▲ 이번 화재의 원인이 되는 문제의 심각성을 2022년 카카오 먹통, 2023년 행정전산망 마비 사태 당시에 이미 알고 있었음에도 이를 방치 방과하고 있었던 행정안전부와 국가정보자원관리원. ⓒ 연합뉴스

시스템 부재뿐 아니라 시설 관리 실태는 더욱 경악스럽다. 화재가 발생한 대전 본원은 건축된 지 20년이 넘은 노후 시설이었다. 충격적인 사실은 화재의 주범인 배터리와 국가 핵심 데이터를 담은 서버 사이의 간격이 고작 60㎝에 불과했다는 점이다.

성인 한 명이 옆으로 걸어가기도 빠듯한 좁은 공간에 국가 핵심 인프라를 밀집 배치, 화재 발생 시 순식간에 번질 수밖에 없는 시한폭탄을 방치한 셈이다.

데이터센터의 기본적인 안전 원칙인 화재 위험 요소와 서버의 물리적 분리조차 지켜지지 않았다.

이번 사태는 단순한 행정 불편을 넘어 국가 안보에 대한 중대한 위협으로 직결된다. 데이터센터 하나가 무너지면 국가 기능이 멈춘다는 치명적인 약점을 북한을 비롯한 적대 세력에게 노출했다.

이중화 시스템의 부재, 시설의 노후화, 복구에 소요되는 장시간 등 우리가 스스로 드러낸 약점들은 전시나 안보 위기 상황에서 국가 전체를 멈추게 할 수 있는 치명적인 아킬레스건이 될 수 있다. 이는 디지털 주권과 안보에 대한 심각한 위협으로 인식돼야 한다.

더불어 국제사회에서 어렵게 쌓아 올린 대한민국의 디지털 정부 신뢰도와 국가 브랜드 가치가 추락됐다. 

UN 전자정부 평가 1위를 자랑하며 전자정부 시스템을 수출까지 했던 대한민국의 위상은 이번 화재 하나로 무너졌다.

국제사회는 "한국의 디지털 정부는 겉만 번지르르하고 재난 대비가 부실하다"고 평가할 것이며, 한국형 전자정부 시스템 도입을 고려하던 국가들은 재고할 것이다.

국가 외교와 경제적 손실로 이어지는 무형의 막대한 피해다. 국민은 일상이 멈추고 업무가 중단됐으며, 정부의 거짓 약속에 국가에 대한 신뢰 자체가 무너지는 고통을 겪었다.

▲ 박순장 전 소비자주권시민회의 사무처장

모든 피해는 예산 부족이 아닌 우선순위와 의지의 문제였다. DR 시스템 구축에 필요한 비용이 국가 전산망 마비로 인한 경제적, 사회적, 안보적 손실보다 컸을 리 없다.

문제의 심각성을 2022년과 2023년에 이미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재난 대비 시스템 구축을 미루고 노후 시설을 방치한 국정자원 원장과 소관 부처인 행정안전부 장관을 비롯한 고위 관리자들의 책임은 명백하다.

이들은 '3시간 내 복구'를 호언장담하면서 정작 해야 할 실행 대신 '계획 수립'과 '시범사업'이라는 핑계로 직무를 유기했다.

철저한 진상 조사와 관련 책임자들에 대한 엄중한 문책이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

책임자 문책은 단순한 보복이 아니라, 공직 기강을 바로 세우고 제2, 제3의 인재를 막기 위한 핵심적인 조치다.

국가 안보를 위협하고 국민 신뢰를 붕괴시킨 이 사태에 대해 국정자원 원장 해임은 물론, 행정안전부 장관 등 고위 공무원들에 대한 징계와 법적 책임까지 물어야 한다.

국민이 겪은 막대한 고통과 불안에 상응하는 책임이 뒤따르지 않는다면,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무책임한 행태는 반복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