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빡빡하고 가려워서 안과에 갔더니 의사가 제 생각과 전혀 다른 처방을 해줬습니다. 다초점 렌즈로 된 안경을 쓰지 말고 집 안에서는 안경을 벗고 지내라고 했습니다. 안경을 벗으면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줄로 알고 있던 저에게 나이가 그런 나이고, 안경을 벗어도 책을 볼 수 있는 시력이 되니 안경을 벗고 책을 보라고 권했습니다.

의사 처방대로 해보니 맞았습니다. 안경을 쓰지 않아도 가까운 사물은 볼 수 있다는 생각을 미처 하지 못했었고, 굳이 안경을 써야만 사물을 볼 수 있다고 생각했었습니다. 보지 않아도 되는 걸 안경을 써서 자세히 보는 것보다, 안경을 벗고 봐야 할 것만 보는 게 더 나은 나이인데 그걸 몰랐었습니다.

처음 노안이 왔다는 걸 알았을 때는 '벌써'라는 생각에 자괴감이 들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거울 앞에 노안으로 선 제가 문득 대견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겪으면서 살았던 시공간의 주된 경험과 달리 세상을 여전히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서 희망으로 바라보면서, 입력보다 나은 데이터를 출력하고 있는 제 몸이 고마웠습니다. 그래서 생각을 바꿨습니다.

▲정이신 논설위원
▲정이신 논설위원

지금 제가 가진 용지에는 7∼80% 이상을 채운 입력 데이터의 내용보다 더 좋은 게 출력돼 있습니다. 앞뒤가 맞지 않는 이런 결과가 나온 이유는 노안으로만 설명 가능합니다. 세미한 것까지 따지는 전자계산기를 동원한 셈법으로는 제 삶을 설명하기 힘듭니다. 노안이 가져다준 신앙의 프리즘으로 멀리 봤을 때만 이 상황을 설명할 수 있습니다.

노안으로 그동안 꾸준하게 했던 사회활동을 되돌아보니, 한 사회에 만연해 있는 차별과 불평등은 쉽게 없어지는 게 아니었습니다. 또 이런 목표는 우리 세대에 다 이룰 수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후손의 도움이 있어야 가까스로 도달할 수 있는 목표를 저의 세대에 다 이룰 수 있다고 그동안 만용을 부렸었습니다. 그래서 앞으로는 우리 후손이 부모 세대와 같이 이걸 넘어설 수 있게 도와줘야 한다고 생각을 보정했습니다.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후손을 키우기 위해 먼저 해야 하는 게 인성훈련입니다. 인성은 따로 가르치는 게 아니고 더불어 생각하는 힘을 길러주면 자연스레 생성됩니다. 나 혼자 잘 사는 법이 아니라, 더불어 잘 사는 법을 가르치면 인성은 그 길을 따라서 길러집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 책 읽기 놀이를 같이하면 학습효과가 더 좋습니다. 책 읽기마저 노동으로 만들어 놓고 인성교육을 말하는 건 너트 없이 볼트만 서로 잇댄 것과 같습니다.

어떤 이가 '아프리카에서 굶주림으로 죽은 아이는 사실 굶어 죽은 게 아니고 살해된 것'이라고 했습니다. 노안으로 보니 이 글이 달리 보였습니다. 그래서 이 글을 패러디해 "우리나라에서 돈이 없어 배우고 싶은 욕구를 채우지 못하고 교육기회를 박탈당한 학생들은, 인간 사회가 여전히 이성적 '동물'이라는 정글의 법칙을 벗어나고 싶지 않은 욕망을 채우기 위해, 인신공희의 제물로 바쳐진 아이들"이라고 주저리주저리 긴 글을 공동체 밴드에 썼습니다.

늘 부딪치는 건 인간 본성에 대한 울분과 희망의 변주곡입니다. '사람이 그런 일을 겪고도 그렇게 안 변하냐'와 '아, 그래도 이런 사람을 보니 희망이 있다' 사이를 제가 왔다 갔다 합니다. 그런데 노안으로 세상을 보니, 바로 앞의 울분보다 먼 거리에 있는 희망이 더 잘 보입니다. 가까운 흠보다는 먼 거리의 사물이 더 많이 보입니다. 그래서 교육기회를 평등하게 제공하는 사회를 만들어 보자고 여전히 외치고 있습니다. 이처럼 노안은 어떤 게 가까이 보면 흠이지만, 멀리 보면 조화를 이루는 것임을 알려준 보배로운 안경입니다.

우리 아이들에게 어떤 한반도를 물려줄 수 있을까요. 때로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고작 이 정도뿐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그럴 때면 마음이 무겁지만, 그래도 제대로 가르치는 게 모든 것의 시작이라는 생각에 다시 발걸음을 재촉합니다. 이 모든 게 노안이 준 힘입니다.

■정이신 논설위원·목사 △한양대 전기공학과 졸업 △백석대 신학대학원 졸업 △아나돗학교 대표간사 △아나돗공동체 위임목사 △세이프타임즈에 '노희(路戱)와 더불어 책(冊)놀이' 연재, 칼럼집 <아나돗편지(같이 비를 맞고 걸어야 평화가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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