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스파 다비드 프리드리히의 작품 '안개바다 위의 방랑자'

▲ 카스파 다비드 프리드리히의 작품 '안개바다 위의 방랑자'(1818·캔버스에 유채·94.5×74.8㎝) ⓒ 함부르크 미술관
▲ 카스파 다비드 프리드리히의 작품 '안개바다 위의 방랑자'(1818·캔버스에 유채·94.5×74.8㎝) ⓒ 함부르크 미술관

때로는 뒷모습이 더 많은 의미를 전하기도 하는 법. 바위산 꼭대기에 우뚝 선 남자의 뒷모습이 인상적이다. 산 정상에서 불고 있는 세찬 바람에 그의 짧은 금발이 흩날린다. 발 아래로 보이는 안개는 거센 파도처럼 하얗게 부서지며 주인공의 심리를 대변하듯 호기롭게 시각적 쾌감을 이끌어내고 있다.

망망대해 같은 안개바다를 바라보며 남자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그는 지금 상당히 결연한 의지를 다지고 있는 듯하다. 동양의 선비처럼 자연을 관조하는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과는 분명 느낌이 다르다.

동양에서는 노장사상(老莊思想)을 바탕으로 서양보다 먼저 자연을 소재로 산수화(山水畵)를 그려왔다. 서양에서는 17세기가 돼서야 풍경화가 하나의 장르로 인정을 받지만, 동양에서는 이보다 훨씬 앞선 6세기경부터 산수화가 그려지기 시작했다. 인간의 삶은 자연과 더불어 존재하며 '자연과 인간은 하나'라는 자연합일(自然合一) 사상이 모든 사고의 기저에 깔려있었기 때문이다.

여백(餘白)의 미는 동양미학에서 공간을 표현하는 중요한 요소로 '비어있음'을 통해 역설적이게도 꽉 찬 존재감을 드러낸다. 산수화에서 안개와 구름은 여백의 미를 통해 작가의 기량을 한껏 드러낼 수 있는 중요한 장치다. 이는 감상자에게 심리적 해방감을 불러와 좁은 화폭을 벗어나 시야를 탁 트이게 확장시켜 미적 쾌감을 불러일으킨다. 그리하여 산은 더 높아지고 골짜기는 더 깊어지는 것이다.

재미있게도 산수화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숨은그림찾기처럼 개미 같이 작은 사람들을 발견하게 된다. 신비롭고 푸근한 운무(雲霧)에 둘러싸인 거대한 자연의 모습은 그 자체로 인간에게 경외감을 느끼게 하며 보는 이의 시선을 압도하다가도, 그 속에서 자연에 순응하며 유유자적 하게 사는 인간의 모습을 통해 어지럽게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 자신을 돌아보게 만든다.

▲ 카스파 다비드 프리드리히의 초상(왼쪽). 동료 화가 게르하르트 폰 퀴겔겐 그림, 프리드리히의 작품 '안개바다 위의 방랑자'의 일부분
▲ 카스파 다비드 프리드리히의 초상(왼쪽) 동료 화가 게르하르트 폰 퀴겔겐의 그림, 프리드리히의 작품 '안개바다 위의 방랑자'의 부분

하지만 이 그림은 동양의 그것과는 다르게 자연을 객관적인 대상으로 바라보는 서양의 자연관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자연은 그저 인간을 둘러싼 배경일 뿐 만물의 영장인 인간이 주변 세상을 변화시킬 주체라는 사고방식이다.

결국 자연은 그 광활함과 변화무쌍으로 인해 인간에게 두려움의 대상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인간의 의지로 인해 변화를 맞을 운명이라는 것을 화가의 붓끝을 통해 예고라도 하듯 말이다.

그러면 정작 이 그림을 통해 화가가 말하고 싶은 것은 무엇일까. 아마도 저 고독한 남자가 바라보고 있는 것은 안개 너머에 존재하기를 간절히 바라는 그가 꿈꾸는 이상세계일 것이다. 그렇기에 끝없이 펼쳐진 대자연과 당당히 맞서고 있는 이 남자는 화가 자신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요동치고 있는 안개의 바다는 예술가로서 표현의 자유가 억압된 시대적 상황에 대한 은유적 표현이다.

독일 낭만주의 대표적인 화가 카스파 다비드 프리드리히(Caspar David Friedrich·1774~1840)가 살았던 19세기 초반 당시의 독일은 '빈 회의' 이후 오스트리아의 재상 메테르니히의 강압적인 정권 하에서 정치인은 물론 예술가들도 이른바 '카를스바트 선언'으로 모든 작품들이 검열을 받는 위기에 처해 있었다.

마치 박정희 군사정권 시기에 유신 통치에 방해가 되는 저항적 문화의 흐름인 청년문화의 확산 방지를 위해 대중문화와 예술을 억압했던 것과 일맥상통 한다고 볼 수 있다.

나폴레옹에 의해 해체된 신성로마제국, 즉 독일의 운명이 빈 체제에 동참했던 오스트리아, 영국, 프랑스, 러시아 등 열강의 손에 달려있었다. 게다가 유럽의 어느 나라도 독일의 통일을 원하지 않았다. 이 상황에서 프리드리히는 조국을 위해 나폴레옹 지배에 반대하는 독일의 민족주의 운동과 자유주의 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남자가 입고 있는 짙은 녹색의 옷은 독일의 민족주의와 자유주의적 이상을 이루기 위해 결성된 '부르셴샤프트'라는 독일의 애국적인 대학생 단체의 단복이다. 프리드리히는 자신이 처한 현실에 대한 저항과 새로운 시대로의 혁명적 변화를 모색하는 그의 의지를 저 뒷모습의 남자를 통해 드러낸 것이다.

▲ '안개바다 위의 방랑자'를 오마주 한 영화 포스터(왼쪽). 영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화'의 포스터, 영화 '2012'의 포스터
▲ '안개바다 위의 방랑자'를 오마주 한 영화 포스터 (왼쪽)영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화'의 포스터, 영화 '2012'의 포스터

유년 시절 프리드리히는 엄격한 루터파 교도였던 아버지에게 양육받았고, 불행하게도 뭉크처럼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비롯해 사랑하는 형제자매가 죽는 것을 지켜보면서 삶과 죽음에 대한 명상을 많이 하면서 성장한다. '자연은 신의 계시'라는 가르침을 받아들인 그는 이를 바탕으로 자연에 숭고한 정신을 담아 자신만의 독특한 종교적 신념이 담긴 풍경화를 주로 제작했다.

미지의 세계와 같은 거친 세상에 홀로 던져졌으나 이에 주눅 들지 않고 자신의 신념을 실천하려는 강한 정신이 전 생애에 걸쳐 그의 작품에 녹아있다.

그러나 이 그림의 제목 <안개바다 위의 방랑자>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자신의 신념대로 살다가 언제라도 훌훌 털고 다른 곳으로 발길을 돌릴 수 있는 방랑자로 자신을 표현했다. 우리는 모두 지구를 다녀가는 여행자처럼 이 세상 잠깐 들렀다가 떠나는 방랑자가 아닌가.

이후 그의 작품은 오랫동안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힌 채로 지내다가 20세기에 들어와 그의 작품에서 실존주의적 고독을 찾아낸 이들에 의해 새롭게 재평가되기 시작했고, 1970년대엔 비로소 독일 낭만주의의 대표적 화가로 인정받으며 이 그림이 다시 주목 받게 된 것이다.

현재는 다양한 장르에서 이 작품을 '오마주' 하면서 뉴미디어로 이미지가 재생산 되고 있다. 이 그림을 단 한 번이라도 본 사람이라면 신비로운 기운이 감도는 뒷모습의 이 남자를 잊는 게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뒷모습의 남자와 안개라니, 이 가을에 너무 낭만적이지 않은가.

■ 조경희 미술팀 전문위원 = 충북대학교 사범대학에서 미술교육학을 전공한 뒤 동 대학원에서 미술교육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충북 단양군에서 교편을 잡은 뒤 미술교사로 재직하면서 충북대학교 미술학과에 출강하며 후배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현재 서울 성수고등학교에 근무하고 있다. ⓒ 세이프타임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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