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3년 12월 1일 삼성전자가 국내 최초로 미국에서 개발한 64K D램 반도체를 기흥단지에 들여와 양산하게 됐다고 발표했다(위). 1997년 12월 4일 한국정부가 550억달러에 달하는 긴급구제금융을 IMF를 비롯한 국제기구단으로부터 받기로 했다는 동아일보 기사 보도 (아래). ⓒ 김철기 논설위원
▲1983년 12월 1일 삼성전자가 국내 최초로 미국에서 개발한 64K D램 반도체를 기흥단지에 들여와 양산하게 됐다고 발표했다(위). 1997년 12월 4일 한국정부가 550억달러에 달하는 긴급구제금융을 IMF를 비롯한 국제기구단으로부터 받기로 했다는 동아일보 기사 보도 (아래). ⓒ 김철기 논설위원

전경련이 지난달 한국전 70주년을 맞아 '대한민국을 만든 이슈 대국민 인식'에 대한 설문조사에서 한국전후 70년 동안 가장 기억에 남는 우리나라의 업적으로 경제·산업 분야에서 '삼성의 반도체 진출'(응답자의 64.2%)과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극복(52.1%)을 꼽았다.

그런데 필자는 운 좋게도 이 두가지 사안에 모두 기여할 수 있었다. 1982년 한국은행에 입행해 해외투자허가 업무를 담당하면서 1983년 삼성전자의 최초 반도체 연구개발 목적의 해외투자건을 신청받아 허가가 나도록 도왔다.

1995년 아시아개발은행(ADB)으로 옮기면서 1997년말 IMF 외환위기가 발발했을 당시 동아시아금융국에 근무했다. 한국에 대한 구제금융 10억달러 지급건을 직접 결재했다.

1982년 한국은행에 입행해서 기업의 해외투자 허가담당 보직을 맡았다. 이듬해 1983년 하반기 삼성전자가 최초의 반도체개발을 목적으로 한 해외투자 허가를 신청했다.

삼성전자 반도체사업부가 미국 실리콘 밸리에 500달러나 되는 당시로서는 어마어마한 금액을 투자하겠다는 계획이었다. 재미 과학자를 활용해 64K DRAM(D램) 반도체 시제품을 6개월만에 개발한 뒤 들여와 기흥단지에서 양산을 하겠다는 '야심찬' 사업계획이 담긴 해외투자 허가 신청건이었다.

일본이 5년 넘게 걸렸던 64K D램 개발을 삼성이 6개월만에 해낸다는 야심찬 계획이었다. 삼성이 제출한 향후 10년간 사업계획서에는 10년 후인 1992년까지 1M D램의 개발에 성공하겠다는 '비밀계획'이 담겨져 있었다.

그런데 삼성이 6개월만에 목표한 64K D램의 국내 양산을 시작한 것뿐만이 아니라 10년후로 계획한 1M D램 개발을 달성하는 데 채 4년이 걸리지 않았다.

1986년 7월 1M D램을 개발한 데 이어 4M D램시장에서 선두주자 일본을 따라잡기 시작했다. 삼성은 1992년 64M D램을 세계 최초로 개발했다. 메모리 강국인 일본을 따돌려 버렸다.

그런데 필자가 1992년 한국은행의 학비지원을 받아 유학을 간 학교가 미국 유펜의 와튼스쿨이었다. 석사과정 2년차 경영전략 과목에서 하버드 사례연구(case study) 수업이 있었다. 한 사례의 제목이 '후발주자였던 삼성이 어떻게 4M D램 시장에서 일본의 선발그룹을 제칠 수 있었나'였다.

필자는 히다찌 등 일본의 선발그룹이 4M D램시장이 미처 성숙하지 않은 상태에서 성급하게 1M D램시장에서 4M D램시장으로 옮겨간 것이 문제였다고 지적했다.

또 막대한 시설투자가 드는 장치산업인 반도체사업에서 큰 손실을 입고 주춤하는 사이에 후발 삼성이 1M D램시장에서 엄청난 이익을 챙겨 자금경쟁력을 확보한 덕분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반도체사업 출발이 일본기업들에 비해 10년이나 늦었던 삼성에게 대단한 행운이 주어진 것이다.

당시 일본 학생들이 월등하게 많았던 수업에서 필자는 '극일'의 통쾌함을 만끽할 수 있었다. 당시 한국의 가전분야 경쟁력은 일본에 비해 정말 형편없는 시기였기에 말이다.

▲ 파킨슨병을 앓고 있는 본지 김철기 논설위원(한국안전수영협회 이사장)이 세이프타임즈가 주최한 잎새뜨기 강습회를 진행하고 있다. ⓒ 세이프타임즈
▲ 파킨슨병을 앓고 있는 본지 김철기 논설위원(한국안전수영협회 이사장)이 세이프타임즈가 주최한 잎새뜨기 강습회를 진행하고 있다. ⓒ 세이프타임즈

그날 하버드 사례연구 수업의 주인공은 당연히 필자였다. "삼성반도체 사업의 첫걸음을 떼게 도와준 장본인"이라고 배경을 설명해주자 다들 몹시 부러워했다.

1997년말 발발한 한국의 'IMF 외환위기' 극복을 위해 IMF, 세계은행과 ADB가 공조한 '대한국 긴급구제금융' 지원프로그램팀 일원이었다. 1998년 정초에 ADB의 대한국 지원금 10억달러를 직접 결재해 한국은행 외환보유고 계정에 입금했다.

당시 1997년 12월 환율은 최고점 1962원으로 연초대비 2배 이상 뛰었다. 외환보유고는 한 때 39억달러까지 감소한 그야말로 '국가부도' 위기 상태였다.

이처럼 초비상사태를 맞게 된 정부가 유일한 방책으로 IMF를 비롯한 국제기구단에 구제금융을 요청했다. 국제기구단과의 피말리는 협상끝에 1998년 12월 IMF, 세계은행과 ADB로부터 550억달러에 달하는 긴급 구제금융을 받기로 합의했다.

당시 한국정부는 IMF로부터 단기성 차입금인 보완준비금 135억달러를 지원받았다. 이는 고금리의 벌칙성 지원금이다.

세계은행 또한 0.5%의 벌칙성 가산금리를 적용한 반면에 아시아 회원국들에게 늘 우호적인 ADB는 벌칙성 가산금리없이 통상적인 차관금리를 적용, 한국정부에 큰 힘을 실어 줬다.

당시 ADB는 한국정부에게 40억달러라는 전무후무한 큰 금액을 세번에 나누어 지원했다. 이중 필자가 결재한 것이 두번째 지원금이었다.

1998년 1월 2일 첫 출근해서 휴가중인 캐나다 국적 국장의 업무를 대행했다. 아침 일찍 결재가 올라 온 10억달러(1조6000억원 상당)의 대한국 지원금을 몸담았던 한국은행의 외환보유고 계정으로 입금할 10자릿수 외화수표를 보는 순간 가슴은 사정없이 뛰기 시작했다.

연말 위기상황을 간신히 넘긴 한국정부로부터 '당일자로 꼭 입금시켜달라'는 다급한 요청을 받고 둘러보니 마침 한국 직원 선배 두 분이 있었다. 흔쾌한 협조 덕분에 이례적으로 당일자로 한은계정에 입금시킨 후 만세를 외쳤던 기억이 생생하다.

이후 한국정부는 국제사회의 예상을 뒤엎고 IMF 구제금융 전체를 불과 3년 9개월만인 2001년 8월에 조기상환했다. 대한민국에 대한 IMF관리체제가 종료됐다.

이는 '금 모으기' 국민운동에서 확인된 우리 국민들의 뜨거운 애국심과 구국열정에 힘입은 결과다.

■ 김철기 논설위원 △고려대 경영학과 졸업 △서울대 국제경영학 석사 △한국은행 △미국 와튼스쿨 MBA △아시아개발은행(ADB) △파킨슨병 진단 △잎새뜨기 생존수영법 공동개발 △대한파킨슨병협회 체육이사 △한국안전수영협회(www.safeswim.co.kr)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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