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상구 폐쇄·물건적치 비일비재 '무사안일'
재수없게 적발돼도 과태료 300만원 '고작'
계약업체·시설관리자 의견 제시 쉽지 않아

▲ 서울의 한 대형 판매시설 비상구 문이 폐쇄돼 있다. ⓒ 독자 제공
▲ 서울의 한 대형 판매시설 비상구 문이 폐쇄돼 있다. ⓒ 독자 제공

"비상구 폐쇄, 비상구 앞 물건 적치 등 반복적으로 지적되는 안전무시 관행에 대해 법·제도 개선, 인프라 확충, 신고·점검·단속강화, 안전문화운동 전개 등 다양한 대책을 통해 근절해 나가겠다."

강력한 의지를 표명한 사람은 바로 '안전컨트롤 타워' 김부겸 행정안전부 장관이다. 김 장관은 지난해 5월 이낙연 국무총리 주재로 열린 국정현안점검조정회의에서 확정된 2018년 국가안전대진단 추진결과 발표를 통해 '비상구 폐쇄, 비상구 앞 물건 적치 관행'을 '안전적폐'로 규정했다.

신고·점검·단속강화를 통해 '생명의 문, 비상구를 사수하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표명했다. 그 후 1년이 다가오면서 가족과 이웃의 생명을 지켜주는 최후의 '피난처'는 안전해진 것일까.

그러나 최근 소방당국의 행보를 보면 안전을 무시하는 관행이 여전한 것을 알 수 있다. 반복되는 화재 참사에도 비상구를 막거나 훼손하는 일이 잇따르고 있다. 

소방당국은 지금도 '비상구 폐쇄 신고'를 독려하고 있다. 강원소방본부는 2010년부터 비상구 신고포상제를 시행해 최근까지 284건을 접수, 포상금 1420만원을 지급했다.

시행 첫 해였던 2010년 530건을 접수해 147건에 대해 1건당 5만원씩 포상금 735만원을 지급했다. 2011년에는 217건에 150만원(30건), 2012년에도 254건에 530만원(106건)을 각각 지급했다.

하지만 포상금을 노리고 무리하게 신고하는 일이 많다 보니 다중이용시설과 대규모 점포 등으로 신고 대상 범위를 줄였더니 2013년부터 신고가 급감했다.

2013년부터 지난해까지 6년간 신고는 고작 34건으로 포상금 지급은 2013년 1건에 그쳤다. 2014년과 2017년에는 아예 신고조차 없었다. 신고가 들어오더라도 포상금 지급 대상에 해당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신고는 급감했지만 현장의 '무법상태'는 계속되고 있다. 최근 강원소방이 특별조사를 벌인 결과, 강릉의 한 마트는 비상구 앞에 판매대를 설치했다가 적발됐다. 원주의 한 영화관은 닫혀 있어야 할 방화문을 소화기로 고정해 열어두는 등 위반행위가 무려 16건이나 적발됐다.

이에 따라 강원소방은 불시 특별단속 등 점검에 소방력을 집중하고 비상구 안전관리 의식 향상을 위해 신고포상제에 대한 적극적인 홍보에 나섰다. 

강원도는 조례에 따라 다중이용시설이나 대규모 점포, 운수시설, 숙박시설 등에서 주 출입구나 비상구를 폐쇄하거나 장애물 설치사실을 신고하면 1회에 5만원을 지급한다.

복도·계단·출입구 등 건축물 피난시설을 폐쇄하거나 훼손하는 행위, 방화문 훼손·변경 또는 고정장치를 설치하는 행위, 소화 펌프·화재 수신반·소화 배관 고장방치나 임의조작도 신고대상이다.

이동학 강원소방본부 예방안전과장은 "다중이용시설과 대형점포 이용때 비상구 등 피난시설을 꼼꼼히 확인해 안전을 스스로 담보하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 항상 닫힌 상태로 있어야 하는 서울 강남의 지하 A웨딩홀이 방화문을 소화기로 괴어 놓은 채 개방하고 있다. ⓒ 최진우 기자
▲ 항상 닫힌 상태로 있어야 하는 서울 강남의 한 A웨딩홀이 방화문을 소화기로 괴어 놓은 채 개방하고 있다. ⓒ 최진우 기자

강원 지역뿐만 아니라 전국 소방관서들이 '비상구 폐쇄, 비상구 앞 물건 적치' 문제와 '전쟁'을 벌이고 있는 실정이다.

광주소방본부 역시 고질적인 불법 행위에 대한 집중단속에 돌입한 상황이다. 불시 단속반과 안전보안관을 운영하고 신고포상제 가동에 들어갔다. 3월부터 단속반을 편성해 화재시 인명피해 우려가 높은 시설을 중심으로 불시 단속을 벌이고 있다.

200여명의 안전보안관을 투입해 안전점검, 홍보캠페인 등을 펼치고 있다. 불법행위를 발견해 관할 소방서에 신고하면 심의 후 신고자에게 포상금도 지급한다.

황기석 광주소방본부장은 "다중이용시설을 출입할 때는 소방시설이나 비상구 등을 먼저 확인하는 게 필요하다"고 말했다.

행안부 장관을 비롯해 소방당국이 연중 캠페인을 벌여도 이같은 문제가 근절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박재성 숭실사이버대 소방방재학과 교수는 "소방시설관리자나 소방점검업체가 시설물 관리에 대한 전문성과 책임감을 갖고 직무를 수행할 수 있는 여건조성이 필요하다"며 "건물주나 최고경영자가 이분야 종사자들에게 책임과 권한을 주고 안전에 대한 책임과 소신감을 가질 수 있는 분위기 조성이 필요하고, 조직분리 등 근본적 문제를 고민해봐야 한다"고 말했다.

배규범 소방기술사는 "제천화재 참사 이후 지난해 7월부터 운영하는 특별조사위원회의 단속 등으로 건물주나 경영주의 의식변화는 종전보다 많이 개선됐다"면서 “셀프점검의 경우 건물주의 안전의식 부족 탓에 의식변화가 크지 않아 위험이 상존하고 있다"고 말했다.

또 다른 전문가들은 '솜방망이 처벌'도 문제라고 지적하고 있다. 화재예방, 소방시설 설치·유지 및 안전관리법은 피난시설, 방화구획이나 방화시설을 폐쇄·훼손, 변경 등의 행위를 하면 300만원 이하의 과태료를 부과하고 있다. 과태료가 너무 적다는 것이다.

호텔 시설관리업에 종사하는 성모씨(62)는 "시설직원이 안전문제를 개선하고 제안하더라도 건물주나 아웃쇼싱 관리업체는 특별한 문제가 없다거나 종합검사때 일시적으로 해결하면 된다는 의식이 팽배하다"며 "건물주나 계약업체에게 시설관리자가 제대로 의견을 제시하더라도 받아들여지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라고 말했다.

또 다른 시설관리업에 종사하는 박모씨(57·여)는 "건물주가 만약 단속에 적발돼 과태료를 내더라도 큰 손해를 보지 않는다는 생각이 팽배하다"며 "정부의 강력한 단속과 법위반에 대한 제재가 강화되고, 건물주의 사고변화가 있을 때 개선될 것 같다. 건물 화재로 인해 건물주의 아들이나 손자 등 가족이 위험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이 문제"라고 말했다.

▲ 국내 한 공항의 방화문이 제대로 열리지 않고 있다. ⓒ 소방청
▲ 국내 한 공항의 방화문이 제대로 열리지 않고 있다. ⓒ 소방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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