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병기 가야금 명인 ⓒ 롯데콘서트홀
▲ 황병기 가야금 명인 ⓒ 롯데콘서트홀

'가야금 명인' 황병기 선생이 31일 오전 3시 15분쯤 별세했다. 향년 82세.

유족에 따르면 황 선생은 지난해 12월 뇌졸중 치료를 받은 이후 합병증으로 폐렴을 앓다가 돌아가셨다고 밝혔다.

1936년 서울에서 태어난 고인은 창작 가야금 음악의 창시자이자 독보적 존재로 현대 국악 영역을 넓힌 거장으로 꼽힌다.

그가 가야금을 처음 접한 것은 1951년 부산 피란 시절이다.

경기중학교 3학년 학생이던 그는 '가야금 한번 배워보지 않겠느냐'는 친구의 권유로 접하게 된 가야금에 첫눈에 반했다.

국립국악원에서 김영윤과 김윤덕에게 가야금 정악과 산조를 두루 배웠고 심상건과 김병호 등에게도 가야금을 배웠다.

그는 경기고 재학생 시절 전국 국악 콩쿠르에서 최우수상을 받았을 정도로 두각을 드러냈지만, 대학은 서울대 법학과에 입학했다. 1950년대 당시에는 국악과가 없었던 데다 먹고 살기 힘든 시절에 국악을 공부한다는 것은 꿈꾸기 어려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대학을 졸업한 뒤 서울대에 국악과가 개설돼 학생들을 가르쳤고 1974년부터 2001년까지는 이화여대 한국음악과에서 교수로 재직했다. 1985년에는 미국 하버드대에서 객원 교수로 강의도 했다.

고인은 교육 활동뿐 아니라 연주 활동도 활발하게 펼쳤다.

1964년 국립국악원의 첫 해외 공연이었던 일본 공연에서 가야금 독주자로 참가했고 1986년 뉴욕의 카네기 홀에서 가야금 독주회를 열기도 했다. 1990년에는 평양에서 가야금을 연주했다.

대표작으로는 침향무, 비단길, 춘설, 밤의 소리 등이 있다. SBS 드라마 여인천하(2001)에서 사용된 가야금 독주곡 정난정을 작곡하기도 했다.

특히 대표곡 미궁은 그의 작품 세계를 잘 드러낸다. 가야금을 첼로 활과 술대(거문고 연주막대) 등으로 두드리듯 연주하며 사람의 웃음소리와 울음소리를 표현하는가 하면 절규하는 사람의 목소리가 삽입되기도 했다.

이 같은 파격 때문에 1975년 명동극장에서의 초연 당시 한 여성 관객이 무섭다며 소리 지르고 공연장 밖으로 뛰어나가는 해프닝도 있었다.

고인은 현대 무용가 홍신자, 첼리스트 장한나, 작곡가 윤이상, 미디어 아티스트 백남준 등 다양한 장르, 세대의 예술가들과 활발히 교류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2004년 호암상, 2006년 대한민국 예술원상, 2008년 일맥문화대상, 2010년 후쿠오카 아시아 문화상을 수상했으며, 2003년에는 은관문화훈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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