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리 '기억의 지속'

▲ '기억의 지속' 살바도르 달리, 에스파냐, 캔버스에 유화, 24.1x33㎝ ⓒ 뉴욕 현대미술관
▲ '기억의 지속' 살바도르 달리, 에스파냐, 캔버스에 유화, 24.1x33㎝ ⓒ 뉴욕 현대미술관

시계가 발명되기 전까지 '시간'이라는 개념은 추상적이고 막연한 것이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시간을 '관리'한다는 것은 인간의 상상력으론 한계가 있었다. 삶이 3차원 공간에서 이뤄지는 인간의 뇌구조는 시간과 공간개념을 넘나들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시계 이전에 해시계와 물시계도 있었다. 하지만 인간이 삶을 분과 초로 쪼개 계획적으로 살게 된 것은 산업사회 상징으로 불리는 톱니바퀴 시계가 상용화되면서 부터다. 

인간은 숫자와 두 개의 바늘을 통해 시간이라는 추상적인 개념을 시각화하는 데 성공하며 시간을 쉽게 이해하게 됐다. 걸어다니면서도 시간을 관리하는 근대적 인간이  탄생된 것이다. 시계는 각자를 긴장하고 준비하게 만드는 등 편리하게 이용됐다. 하지만 아이러니 하게도 만물의 영장인 인간이 스스로 시간에 통제 당하는 웃지 못 할 '하극상'이 연출됐다.

'시간의 노예'가 돼 버린 산업사회 이후의 인간의 눈에 초현실주의 작가 살바도르 달리(Salvador Dali, 1904~1989)의 작품 <기억의 지속 · The persistence of memory>에 그려진 '낯선 형태'의 시계는 보는 이의 시선을 사로 잡는다. 금속성의 시계는 차갑고 단단하지만, 작품속에서는 '나른하게 늘어진' 모습이기 때문이다. 그림 윗부분은 달리의 고향인 에스파냐 카탈루냐 해변을 연상케 하는 자연스러운 풍경인데 반해 근경에 설치된 반듯한 단은 인공적이며 뜬금없다. 그 위에 난데 없이 솟아난 나뭇가지며 녹아내리는 시계는 화면 중심에서 눈을 감고 있는 왜곡된 인물 형상과 함께 몽환적인 분위기를 연출하며 신비감마저 들게 한다.

유일하게 정상적인 형태의 붉은 색 회중시계 위에는 개미떼가 들끓고, 옆에 늘어진 시계 위엔 파리가 앉아 있다. 개미와 파리는 '부식'과 '소멸'을 상징한다. 이것을 통해 달리는 지워지지 않는 기억 앞에 시간 따위는 '속수무책'이라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초현실주의 작가들은 꿈이나 무의식적인 상태 또는 그와 비슷한 상황에서 비롯된 사고의 연상작용에 관심을 가졌다. 당시 달리는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을 비롯한 정신분석학에 심취해 있었다. 독창성은 물론 기괴한 옷차림으로 유명세를 타고 있던 달리는 운명적인 사랑에 빠진다. 상대는 바로 친분이 있던 시인 엘뤼아르의 아내, 10살 연상의 갈라. 불륜으로 시작된 사랑은 달리의 예술을 완성하는 계기가 됐다. (둘은 수십년간의 동거 끝에 갈라의 남편이 사망한 후에야 교회로부터 '정식부부'로 인정을 받았다.)

명작은 단박에 만들어진다고 하던가. <기억의 지속>이 그려진 것도 그러했다. 친구들과 극장에 가기로 약속한 날, 갑작스런 두통에 갈라만 극장에 내보낸 뒤 혼자 남아 우연히 만든 작품이다. 그는 갈라가 돌아오기를 '지루하게' 기다리면서 당시 그리던 풍경화에 신비로운 분위기를 더할 무언가로 고심했다. 마땅한 오브제가 떠오르지 않아 머리를 식힐 겸 작업실을 나가려는 순간, 그의 눈에 시계가 들어온다. 

다시 캔버스 앞에 앉아 시계를 그려 넣으려는데, 이번엔 느닷없이 저녁식사 때 나왔던 카망베르 치즈가 여름이라 더위에 녹으면서 접시에서 흐물거리던 모습이 떠오른다. 영감이 사라질 새라, 갈라가 돌아오기 전에 정신없이 그림을 완성한 달리. 이렇게 급조된 특별한 시계 이미지는 그를 스타로 만든다.

측정된 시간의 엄밀함을 조롱하듯, 녹아내리는 시계는 달리 자신의 경험과 감정을 중첩시켜서 만들어낸 이미지다. 이것은 사람마다 인식의 차이에 따라 시간이 다르게 느껴진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 사람이란 기억하고 싶은 대로 기억한다던가. 시간은 누구에게나 균일하게 느껴지는 게 아니라, 상대적인 것이라는 의미다.

그리고 거기엔 '특별했던 시간'을 일깨워주는 어떤 사물이 조건반사처럼 당시의 감정을 불러내기 마련. 이변이 없는 한 변하지 않을 그 고집스러운 함수관계를 그는 그림으로 표현한 것이다.

무의식의 세계에 침잠해 있는 특정한 기억을 의식의 수면 위로 떠오르게 만드는 장치는 사람마다 다르다. 그것은 사물일 수도 음악일 수도 있다. 달리는 <기억의 지속>에 있는 이미지들을 통해 영원과 소멸에 대해 인간이 가지고 있는 신비로운 의식을 표출하고 있다.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잊혀지지 않는 기억, 시간은 그런 '기억의 고집' 앞에 무용지물이다. 웅덩이물이 얼면서 만들어진 빙판길을 보게 되면 마흔이 훌쩍 넘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학창시절 짧은 치마를 입고 가다가 좋아하는 남학생이 보는 앞에서 오지게 미끄러진 악몽이 되살아난다든지 하는... 

■ 조경희 미술팀 전문위원 = 충북대학교 사범대학에서 미술교육학을 전공한 뒤 동 대학원에서 미술교육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충북 단양군에서 교편을 잡은 뒤 미술교사로 재직하면서 충북대학교 미술학과에 출강하며 후배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현재 서울 성수고등학교에 근무하고 있다. ⓒ 세이프타임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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