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욕재계가 성행한 신라시대는 불교의 영향을 받아 목욕자체가 성스러운 행사였다. 고려시대 목욕은 종교적인 성스러움 보다는 희고 아름다움을 위한 미용수단으로 발전했다.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혼욕으로 변질돼 퇴폐스러움까지 보인다.

"고려인들은 중국인들이 때가 많다고 비웃었다. 그래서 아침에 일찍 일어나 목욕을 한 후 외출을 한다. 여름이면 하루에 두세번씩 시냇가에서 목욕을 했고, 큰 냇가에서는 언덕에 의관을 벗어 놓고 벌거벗은 남녀가 어울려 목욕을 했지만 괴상하게 여기지 않는다."

고려 인종때 목욕을 묘사한 송나라 사신 서긍의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 제23권 한탁(澣濯)편은 당시 목욕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중국인들이 안씻는다고 비웃는 것은 지금과 비슷했던 것 같다. 시대적으로 고려시대와 유사한 시기를 보낸 유럽의 로마제국은 퇴폐적인 목욕문화 때문에 망했다고 한다. 당시 고려인들도 남녀가 혼욕을 할 정도로 성문화가 상당히 개방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고려시대 상류층은 아이에게 하얀 피부를 만들어 주기 위해 복숭아 꽃물로 세수를 시키거나 목욕을 시켰다. 성인도 피부를 희고 부드럽게 하고, 몸에서 향이 나도록 난초로 삶은 물 난탕(蘭湯)에서 목욕을 했다고 한다.

한약제로 쓰이는 복숭아꽃은 꽃잎에 있는 미세돌기성분이 미백과 잡티를 제거하는 기능이 있다. 당김없이 피부를 촉촉하게 해주는 보습효과로 인해 현대에도 유명 화장품의 원료로 사용되고 있다. 난초에는 덴드로빈(dendrobine) 성분과 정유 성분이 풍부, 민감한 피부를 진정시키고 미백효과가 뛰어나다고 한다. 당시에도 희고 뽀얀 피부는 미인의 첫번째 조건이었던 것 같다.

고려인은 온천을 즐겼다. 역대 임금은 온천 행차를 자주했다.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에 따르면 문종 35년(1081) '평주온천에 행차 후 돌아왔다'는 기록이 보이고, 충렬왕 18년(1292)과 충숙왕 4년(1317)에도 '온천에서 사냥을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임금은 병이 생긴 신하에게는 온천욕을 권하기도 했다. 목종 6년(1003년) 한언공(韓彦恭)이 중병을 앓자 의약품과 일용생활용구를 하사하며 온천에 가서 목욕을 하도록 권했다고 한다.

고려인은 온천을 심신단련 후 피로회복을 위한 휴양지 기능과 질병을 다스리는 치료기능으로 이용했던 것을 알 수 있었다. 혼욕의 퇴폐문화만 번성하지 않았다면 조선은 탄생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선화봉사고려도경(왼쪽) 복숭화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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